위대하지만 허술한 우리들의 인생, <위대한 레보스키>

코엔 형제가 파편화된 기억을 그리는 방식

by 성수민

나는 코엔 형제 영화를 좋아한다.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잔혹함이 튀어나오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인생관과 합치되는 면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코엔 형제,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잔혹함과 가벼움, 그리고 코미디가 적절하게 섞여 사건이라는 형태로 나열된 시간의 흐름이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레보스키>는 내 취향을 저격하는 또 다른 코엔 형제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조금 전위적이라거나, 어렵다는 지적 때문에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와 더불어 아직까지도 감상하지 않고 있던 단 둘 뿐인 코엔 형제의 영화였지만 감상한 뒤에는 ‘역시 코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자는 <위대한 레보스키>를 “컬트 영화”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코엔 형제를 좋아하는 나조차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감상 후에 ’코엔 신앙‘이 더 두터워진 것을 보면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1. ‘위대한 레보스키’의 인생, 그런데 이제 망각을 곁들인

주인공 듀드(제프 브리지스 분)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남자들에게 난데없이 폭행을 당한다.


<위대한 레보스키>는 주인공 ‘듀드’가 겪는 일을 따라간다. 극 중 시간으로는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과 따위는 중요도에서 떨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듀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한 기록, 그러니까 이 영화 자체다.


극 중 사건들은 사실 인과관계가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는 인과 그 자체가 있기는 하지만 희미하다.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극의 흐름을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등장인물들을 통한 사건 전개가 관객 입장에서 매우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듀드가 자신과 동명이인인 LA의 부호 ‘제프 레보스키’에게 자신의 무단으로 침입한 두 남자로 인해 망가진 카펫을 보상해 달라며 찾아가는 것, 이후 제프 레보스키가 납치당한 자신의 트로피 와이프 ‘버니’의 몸값을 듀드에게 옮겨달라고 하거나 듀드가 제프 레보스키의 장녀 ‘모드’와 성관계를 맺고, 극 후반 듀드의 친구 ‘도니’가 세상을 떠나는 전개는 다소 의아하다. 다시 말해, <위대한 레보스키>에서는 관객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다소 꼬이고 복잡한, 갑작스런 이야기 전개가 벌어지고 있다.


그럼 이 영화는 대체 왜 이런 전개를 택한 걸까.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는 듀드가 겪은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여러 사건들의 인과는 상관없다. 오직 듀드가 겪은, 영화 내에서는 시퀀스로 표현되는, 각각의 사건들이 중요하다.


듀드는 작중 40대 중반 정도의 독신 백수 남성이다. 친구 월터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이니 듀드 또한 아무리 젊게 잡아도 30대 후반 정도의 나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생동안 많은 것을 겪었음이 틀림없다. 두 남자에게 영문 모를 폭행을 당해본 적도 있을 것이고, 돈을 갚지 않아 쫓겨본 적도 있을 것이고, 박물관처럼 꾸며진 지역 명사의 집에 방문하거나,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거나, 우연찮게 누군가의 포르노 스타 출신 트로피 와이프를 만나본 적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을 죽음을 통해 잃어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레보스키>의 등장인물들은 꼭 그 캐릭터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극 후반에 죽음을 맞는 도니는 도니가 아닐 수도 있으며, 듀드의 기억 속에서 그가 잃은 가까운 망인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영화 <위대한 레보스키>는 듀드라는 한 인간이 겪은 사건들을 코엔 형제라는 각본가가 헐겁게 짜놓은, 인생이라는 이름의 옷이다. 그 옷에는 구멍이 숭숭 나있고 어느 부분은 씨실날실이 엉망진창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렇게 직조해 낸 우리의 인생이 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조금씩 왜곡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망각과 심리적 방어기제로써의 합리화는 기억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인생을 <위대한 레보스키>처럼 묘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2. 현대의 선언, 그리고 현재주의

듀드의 친구 월터(우측, 존 굿맨 분)는 계속해서 베트남 전쟁 시절 이야기를 한다. 가운데는 또 다른 친구 도니(중간, 스티브 부세미 분).

듀드의 볼링 친구 ‘월터’는 등장할 때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사회가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던 자신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월터는 과거에 얽매인 인물이다. 게다가 폴란드계이면서도 전처가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로 유대인을 자처하며, 전처가 여행을 떠난 사이 그녀의 강아지까지 잠시 맡아 기르고 있다.


우린 빨갱이, 베트콩과 싸웠다고. 그런데 지금은 석유 때문에 싸우고들 있잖아.


걸프전 개시로 시작된 <위대한 레보스키>는 현대의 선언이기도 하다. 소련은 걸프전 발발 직전 붕괴되기 시작했고 냉전이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사실상 끝나가고 있었다. 90년대 초반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 모두에게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월터 같은 소시민은 ‘빨갱이를 물리치자’는 정신적, 이념적 대의를 위해 싸웠음에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 ‘석유 따위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월터는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가 우선시되어가고 있는 8, 9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수용하지 못한 채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영화가 개봉한 1998년은 자본주의의 극단을 달린 닷컴 버블 직전,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리는 미국 최전성기의 막바지이기도 하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 새로운 금융자본 시스템 속에서 미국 자본가와 노동자의 소득 차이는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외당하고 있는 월터는 현재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과거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반면 주인공 듀드는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학생 때 볼링이나 치면서 놀았다는 짧은 언급이 전부지만, 사실 현재의 그가 살고 있는 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 그에게 과거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듀드는 침입자들로 인해 카펫이 망가졌고,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움직이거나 사라져 버린 차를 찾는다. 그러니까, 듀드는 극 중 자신에게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만을 한다. 그에게 과거는 없다. 오직 지나간 현재, 현재, 그리고 곧 다가올 현재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듀드가 월터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삶이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스트레스가 일정한 압력으로 계속 내리누르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시나리오들이 제시하는 단순성으로의 회귀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매혹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글러스 러시코프, <현재의 충격> 중


듀드는 그런 면에서 ‘현재주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일정한 강도로 자신을 짓누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스트레스를 그 순간순간 해결하는데 애쓸 뿐이다. 어쩌면 <위대한 레보스키>는 순간순간 처한 상황에 반응하는 듀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단순성으로 회귀한 시나리오’일지도 모르겠다.


3.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

당신은 “레보스키스럽게“ 살고 있는가?

내가 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삶을 그리는 방식이 유쾌하기 때문이다. <카우보이의 노래>에서 뛰어난 총잡이가 다른 총잡이에게 맞아 죽고 난 뒤 그의 영혼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거나, 은행 강도가 교수형으로 처형되기 직전 엷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사람에게 처음 매달려보냐고 말을 건네는 장면이 그렇다. 코엔 형제는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잔혹한 우리 인생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도니의 뼛가루를 뒤집어 쓴 듀드

물론 듀드가 완전한 현재주의적 삶을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삶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그러할 뿐이다. 도니의 뼛가루를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털어내지도 않은 채 볼링을 치러 가는 장면은 가슴 아픈 과거를 ‘온몸에 묻힌 채로‘ 초탈하게 자신만의 현재를 이어나가는 듀드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듀드, 누구나 될 수 있는 ‘인마’는 우리가 주인공인 삶이라는 영화 속에서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삶에 어떠한 큰 의미는 없다. 현재주의적 삶을 실천하는 듀드든, 과거 속에서 헤메이는 월터든 그들은 서로 말싸움을 하거나 볼링을 치며 살아갈 뿐인 것이다. 나는 <위대한 레보스키>가 그려내는 이러한 삶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역시 코엔 형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레보스키스럽게”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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