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은 거창하고, 이제부터는 같이 살기로

유병자가 되었다 1 - 진단받은 그날

by 이하루

진단받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약 2년 간 나를(정확히는 나의 병을) 추적 관찰하시는 의사선생님은 상당히 엄격하신 분이다. 그리고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진단 후 몇 개월 주기로(처음에는 꽤 자주, 수치가 괜찮아지면서 즉, 환자가 관리를 좀 한다 싶을 때부터는 주기를 늘려가면서) 진료를 받을 때마다 지표를 보시며 칭찬을 하신다. 오로지 수치와 그 이면에서 내가 한 행위들에 대해 칭찬을 하신다.


앞에 쓴 글들을 다시 보니 내가 좀 안쓰러워보이는 것 같아서 이쯤에서 자랑을 좀 해보자면,

처음 진단받은 그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치라고 말씀하시며 호되게 혼난 이후로 매번 잘 관리한다는 칭찬을 받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거다.

나 좀 잘한다고 여러분들께 칭찬 받고 싶어서.

그리고 여러분들도 이상한데 병원 안 가셨으면 내일이라도 얼른 가시고, 이미 진단받아 관리 중이시라면

우리 같이 잘 관리해서 서로 자랑 좀 해보자고.


엄격한 의사선생님께서는 환자가 잘 볼 수 있도록(나의 해석으로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도록) 환자 쪽으로 초대형 모니터를 두고, 검사 결과를 띄워 놓으셨다.


공복혈당 180, 당화혈색소 9.6


숫자로만 보면 감이 잘 안 오실 거다.

이 그림은 질병관리청에서 배포한 당뇨병 관련 카드뉴스다.


KakaoTalk_20250923_161501974.jpg


당뇨병 기준은 정상, 당뇨병 전단계, 당뇨병 순서로 숫자가 점점 올라간다.

공복혈당은 말 그대로 8시간 이상 공복 상태를 유지한 후 검사한 "그때의" 혈당 수치다.

당화혈색소는 혈액 안에 있는 혈색소와 혈당이 결합된 정도를 말한다.

저 그림에 나와 있는 것처럼 4개의 기준 중 1개만 해당하면 당뇨병으로 진단을 받는데 나는 이미 두 개가 합격(?)이었다. 기준 충족!


공복혈당에는 익숙할 수 있지만 당화혈색소는 초면인 분들이 계실 것 같다.

의사선생님은 뜬금없이 매실청 담그는 것 본 적 있냐 하셨다. 매실은 아주 단단한 과일인데 설탕에 절여 놓으면 설탕을 흡수한 매실이 쪼글쪼글해진다. 당화혈색소는 쉽게 말하면 혈관이 설탕을 흡수해 쪼글쪼글해진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내 혈관은 바로 그 쪼글쪼글한 매실 상태라고...


내 수치는 정상 기준과 비교해 정말... 말도 안 되게 높은 수준이었기에 의사선생님이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치라는 말씀을 하셨을 거다.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그러니까 길을 걷다가 쓰러질 정도로 몸이 이상한 건 아니었는데

그건 내가 잘 못 느끼는 것이었을 뿐.


아! 이 그림을 보니 수상한 증상들에 적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다뇨, 다음도 있었다! 이 중요한 걸 빼먹다니.

목이 끝도 없이 말랐다. 그래서 물을 많이 마시니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끝도 없이 목이 말랐는데, 여러분은 혹시 옛날(?) 영화 "연가시"를 아실까?

기생충을 소재로 쓴 영화인데 감염자들이 물로 막 뛰어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그것 같았다. 물을 정말 끝도 없이 마셨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 있었다. 긴장한 상태도 아니고 일상적인 마음 상태였는데도.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석사 학위 논문을 쓰면서 체중이 많이 불어난 상태였는데,

설명되지 않는 체중감소는 없었다. 진단 후 대기실에 바로 가입한 당뇨병 관련 카페에서

"설명되지 않는 체중감소" 여기까지 가면 정말 큰 일이라고 하더라.


당뇨병 기준을 충족했다는 설명과 함께 의사선생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먹는 것 중 뭘 좋아하냐가 첫 질문이었다.

떡볶이, 빵, 떡, 바닐라 라떼... 라고 하니 의사선생님께서 눈을 질끈 감으셨다.

그게 다 문제라고. 젊은 여성이 당뇨병 지표들이 안 좋으면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묻는데

다 저걸 좋아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두 번째 질문은 가족력이었다.

우리 친할머니께서 제2형 당뇨병 환자셨다고 말했다.


세 번째 질문은 본인의 과거력이었다.

둘째 아이 임신 했을 때 체중이 아주 많이 불었었고, 임신성 당뇨 검사에서 아슬아슬한 수치로 불합격(?)이었다. 그러고 나서 체중을 줄이지 못했다.(잠깐 줄였다가 폭풍 요요를 맞았다는 것이 더 확실한 표현이다.)


모든 조건이 안 좋았다.

그렇게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제2형 당뇨병 환자가 되어버렸다.


지표가 이렇게까지 안 좋은 것은 이미 진행된 지 오래된 상태이니 합병증 검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다시 대기실에 앉았다.

아빠엄마, 남편에게 진단 사실을 알렸다.

손이 덜덜 떨리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살아온 궤적이 워낙 빡쎘었기에 웬만한 일에는 손을 떠는 일이 없는 편인데

말 그대로 손이 덜덜 떨렸다.

두 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아빠엄마가 떠올랐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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