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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화려한 말재간이 알미운 이유

어쩌면 투사

협력업체들의 평가기간이 왔다. 담당별로 관리 점수를 정리해서 어제까지 받았어야 했는데 화장실에서 만난 그녀가 이제야 점수처리에 대해 묻는다.

업체감점 처리요. 그거 예외규정이 따로 없죠? 그냥 다해야 하는 거죠?
그럼요.
제가 처리하는 감점이 너무 크죠?
좀 그렇더라고요. 확인 잘해주셔야 될 거 같아요.
그러니깐요. 드리기 전에 감점 있는 업체들에게 전화해서 설명을 해야 탈이 없을 거 같은데. 그게 낫겠죠?
예... 뭐.. 그렇죠.
그럼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럼 내일까지는 꼭 주세요.
네네 내일까지 드릴게요.

결국 내 입으로 그녀의 제출기한을 늘려주고 말았다. 늘 저런 식이다. 늘 늦게 내는데,  변명이 화려해서 녀에게 말리고 만다. 그녀 국 업체에 다 전화를 돌리지 않았고 나만 빠듯하게 보고를 하게 됐다.


언어의 가장 큰 기능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제스처로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팔짱, 눈 깜빡임, 코를 만지는 손동작. 몸은 고스란히 내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언어는 능하다. 거짓말,  과장,  포장,  속임,.. 다 가능하다. , 그 효과는 각자의 능력에 달려있다.


그녀 말 결론은 점수 수합분  늦게 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을 쏙 빼는 말재간으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자기가 원하는 기한연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당한 느낌이다. 왜 담백하게 '미안하지만 조금 늦게 내도 되나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왜 저리 돌리고 돌려서 본인의 의도를 숨기다가 순간을 찔러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 응큼하다.


난 또 뭔가. 뒤늦게 깨닫고 아뿔싸를 외치는 일 뿐 아니라 , 알고도 당하는 일도 수두룩하다. 입에 본드를 붙여놨는지 순발력이라고는 일도 없이 어버버버를 하거나 심지어는 상대가 원하는 바를 내 입으로 내뱉고 만다. 감사하다는 멘트는 습관처럼 꼬리에 찰싹 달라붙어있다. 감사하긴 뭐가 감사하니.


바보. 멍텅구리인 나와 앙큼하고 얄미운 그녀의 대화는 결국 자려고 누운 내 머릿속에서 꼽씹어진다. 아 놔,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아우 밥팅아. 발로 이불을 걷어 찬 들 그때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맏이여서인지, 혹은 술 취하면 나를 붙잡고 진실하게 살아라, 머리 굴리지 말아라 노래를 부르셨던 아빠의 세뇌 때문인지 나는 특유의 고지식함이 있다. 인맥을 통해 혜택을 얻는 것은 반칙 같다는 내 말에 그 나이에 그런 영감 같은 구석은 어디서 온 거냐며 깔깔 웃던 상담선생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세상은 평면이 아니라 이렇게 보면 이게 맞고 저리 보면 저게 맞. 내가 보기엔 인맥의 혜택은 불공정이지만, 그들에게 인맥은 스펙이다.  힘들고 어렵게 쌓아온 스펙을 활용하는 것을 막는 것은 공정한 걸까.

그녀의 화려한 언변도 누군가는 하는 바를 이루는 세련되고 전술적인 방법이라 한다. 아빠 대로 결국 '머리 굴리지 않고 정직하게'말하는 법만 배운 나는 누군가에겐 사람을 대할 줄  모르는 어리숙하고 둔한 사람일 수도 있고.


옳고 그름의 문제라 생각하면 옳지 않은 태도를 취하기가 힘들. 그러나 때론 정직하게, 때론 애둘러서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선택하는 문제라 여기면 떨까. 상황에 맞게 태도를 골라 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덜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다.


칼 융인간은 의식화된 면과 동시에 무의식에 억압된 면이 있고, 내 안에 없면은 내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무의식에 다른 이를 설득하여 영리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하고 싶은 마음이 다.

그러나 세뇌때문인지 억눌린 상태로 있어 스스로는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나의 내면을 그녀에게 투사*하여 영악하게 다른 사람을 조종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다며 비난하는 상황이라 봐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가 영리하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하는 모습이 나의 것이라면, 그녀의 말재간도 긍정적으로 보고  필요할 때 활용할 방법을 연구할 일 남은 걸까.

거기까진 갈길이 멀지만, 어쩌면 내 모습일지도 모를 그녀를 오늘부턴 좀 덜 미워할 수는 있겠다 싶다.  


다행이다. 한 명 줄어서 999명 남았다.


*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모르는 내 마음의 부분이 투사되어 마치 밖에 있는 것처럼 지각한다는 말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대상에 대하여 강렬한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대상에 무엇인가 자기의 무의식적인 것을 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분석심리학 이야기> 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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