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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만쥬 Dec 18. 2022

9일차 드디어 맑은 하늘

2020년 2월 22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카페 센트럴

유명한 카페인 센트럴에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이른 시간에도 웨이팅이 4팀 정도 있었는데, 나는 혼자여서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브런치를 주문하고 커피는 멜랑주,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중 평소 먹어보지 못한 '멜랑주'를 주문했다. 서버가 에단호크를 닮아서 멋있었다. 근사한 곳에서 여유 있는 브런치를 즐기고 카페를 나오니 금세 줄이 엄청 늘어서 있다. 일찍 오길 잘했다!


옛 것을 지킨다는 것

흔한 얘기로 유럽의 나라들을 두고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것들로 먹고사는 나라라지만, 선조들이 남겨 좋은 걸 잘 지키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금의 사람들이 없었다면 모두 역사로 한 페이지로 그저 사라졌을 것들이다. 로스하우스 앞 공사 중에 발견하여 그대로 보존해놓은 유적이나 쇤부른궁에 나폴레옹 아들의 새와 같은 유적뿐만이 아니라 100년, 200년 된 집에서 사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150년 된 카페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 무엇이 좋고 나쁜 건 아니겠지만, 어느 부분은 조금 부럽기도 하다. 



미술사 박물관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관이었다. 1층을 둘러보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내부는 쇤부른 궁전 못지않게 아름답고 화려했다. 온통 대리석과 금장식으로 뒤덮여 있고 천장과 천장을 받치고 있는 아치 벽에는 클림트를 비롯한 당대 최고 화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라는 책을 읽고 '테세우스그룹' 조각이 정말 기대되었고 가장 보고 싶었다. 박물관 로비에서 전시관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을 마주했을 때 저 위에 켄타우로스를 제압하는 테세우스의 모습이 보이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고 웅장했다. 이 화려한 장식 앞에 놓인 높은 계단과 그 계단 끝에 웅장하게 서 있는 테세우스를 보면서 입장한 순간부터 압도당했다. 책에서는 이 작품을 박물관 가장 앞에 전시한 것을 구시대적인 것들을 탈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했는데, 그 의미를 알고 보니 더 강렬하고 웅장해 보였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사박물관



날씨가 좋을 때는 광장으로

미술사박물관을 나와서 레오폴드 미술관을 가려다가 갑자기 햇볕이 너무 좋아져서 미술관에 가지 않고 무작정 걷고 싶었다. 그래서 동선 변경!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 '비포 선라이즈'에 나온 엘피샵에 갔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휴무였다. 좀 걷다가 간단히 점심으로 브리또, 맥주를 사서 광장으로 갔다. 미술사박물관 앞 잔디에 앉아 햇볕 누리기~ 언제 또 갑자기 흐리고 추워질지 모르니 만끽해야지! 햇볕이 좋으니까 미술관은 나중에 가고 오늘은 제체시온과 전망대 가기로!



제체시온와 베토벤 프리즈

책을 읽고 가장 기대되었던 빈 분리파 전시관 '제체시온'. 책을 통하여 클림트를 필두로 정통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었던 빈 분리파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 정신과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재능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정신이 그대로 깃든 곳에 직접 오다니 정말 설레었다. 특히 베토펜 프리즈는 압권이었다.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을 들으며 클림트의 벽화를 하나하나 따라가 보았다. 교향곡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벽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을 보았는데 소름이 돋았다. 빈 분리아의 정신을 빼놓고 보더라도 이 벽화와 음악을 함께 듣고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총체적 예술의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나와서 건너편으로 가 제체시온의 둥근 월계관이 보이게 사진을 찍었는데, 설레고 벅찬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사진을 볼 때마다 들뜬다. 그런데,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보니 오디오 가이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권을 내고 빌린 거라 반납 안 했음 큰일 날 뻔! 사진 확인 후 부랴부랴 다시 가서 반납하고 나왔다. 오디오 가이드 반납도 잊은 채 설렘 가득하게 활짝 웃고 있는 내 모습. 왠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에 와서 신난 미술학도 느낌이 나서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든다! 


시대에는 에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슈테판 성당 전망대

도시 여행을 왔다면 시시하더라도 전망대는 꼭 들려줘야지~ 사실 날씨가 흐리면 전망대는 굳이 안 가려고 했는데 오늘 웬일로 날이 맑아서 슈테판 성당 전망대에 갔다. 리프트 이용권 사는데 잠시 파이프오르간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답고 웅장한 소리였다.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프라터 공원의 대관람차가 보였다. 날씨도 좋고 교통권도 있겠다 이따 해지고 나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놀이공원에 혼자 가면 정~말 재미없을 것 같아서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페라극장에서 입석 표를 사서 오페라를 보고 싶었다! 전망대에서는 일몰까지 보고 내려가려고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일몰은 보지 못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핑크빛 일몰을 기대했는데 구름이 많아서 그냥 어두워졌다. 



첫 유랑 동행

전망대에서 내려와 오페라극장에 갔는데 오늘은 오페라가 아니라 발레 공연이어서 보고 싶지 않았다. 프라터 공원에 혼자 가기는 싫어서 한번 유랑 카페에 들어가 봤는데 딱 비엔나에서 저녁 먹을 여자 동행 구하는 글이 있길래 연락해서 고고! 마침 오페라극장 근처 식당에 있었고, 동행들도 막 식당에 도착한 참이어서 나도 합류하기로 했다. 나와 동갑의 간호사, 대학생 이렇게 셋이서 맥주를 먹으며 간만에 한국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괜히 주변 눈치가 보여 코로나는 '그거'라고 하면서 간호사 친구에게 한국에서의 코로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오페라극장 야경도 보며 사진도 많이 찍고 정말 즐거웠다.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

오늘은 비엔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내일 저녁이면 부다페스트로 떠난다. 3박 4일이면 비엔나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비엔나가 너무 좋아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버스 시간을 두 번이나 바꿨다. 그러고도 아쉬워서 걷고 또 걸었던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끝나간다. 



조심과 편견 사이

동행과 걸어서 슈테판 성당 야경까지 보고 왔다. 확실히 밤이 되니 취객도 보이고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직 사람이 많은 번화가라 괜찮다고 느낀 나와 달리 동행은 경계태세를 가동하였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를테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몰려 있는 백인 남자애들)이 보이면 '쟤네는 인종차별할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멀찌감치 피해 갔다. 그 모습이 문득 오히려 역으로 편견을 갖고 지나치게 경계한다고 느껴졌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 차별 문제가 심해져서 더욱 조심하는 게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모습의 외국인은 동양인을 차별한다는 편견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그리고 높은 확률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예방하느라 이 멋진 밤거리를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동행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런 조심하는 태도가 나에게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일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운 좋게도 그간 여행이 무탈하여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건가. 하지만 생각해본 결과는, 우려하는 인종차별 행동들이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싶다. 그저 여행 중 운 나쁘게 개념 없는 사람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인데, 그런 일들이 생길까 마음을 졸이며 다니기는 싫다. 이미 나도 모르게 많은 편견이 있을 텐데, 편견을 더 추가하고 싶지도 않다. 원래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나. 최소한 여행에서는 좋은 생각 많이 하고 가능한 열린 태도로 많이 보고 느끼는게 좋은 것 같다. 어쨌든 오늘 밤 동행이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멋진 야경을 즐겼다!



처음으로 무서웠던 순간

야경까지 보니 꽤 늦은 시간에 헤어졌고 설상가상 트램을 잘못 내려버렸다.. 핸드폰 배터리가 별로 없어 실시간 위치 확인을 못하고 마음이 초조해져서 괜히 지나친 것 같아 내렸더니, 몇 정거장 일찍 내려버린 거다. 고작 몇 정거장 차이인데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고 사람도 없는 곳이어서 조금 무서웠다. 늦은 시간이라 배차 간격은 길어서 트램은 한참 후에나 오고, 핸드폰은 꺼지기 직전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찾아가 집에 도착하니 열한시쯤 되었다. 정신 잘 챙기자!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 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간의 유럽 여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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