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이탈리아 베니스
여행의 시작,
정말 내가 혼자 베니스에 왔구나
오후 2시, 이탈리아 베니스에 도착했다. 본섬에 가기 위해 공항버스를 탔는데 버스에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낯선 느낌, 그리고 버스에서 물씬 느껴지는 외국 냄새! 긴장되고 설렜다. 본섬에 도착해서 숙소로 가기 위하여 수상 버스를 탔다. 4년 전에 친구와 왔을 때는 수상버스를 한 번도 안 타고 도보로만 이동했었는데, 이번에는 교통권을 샀으니 수상 버스를 많이 타봐야지. 수상 버스 뱃머리 쪽 야외 자리에 서서 베니스의 대운하를 가로지르며 가니, 이제야 베니스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무거운 캐리어를 잠시 내려두고, 공항에서 숙소 가는 길과 교통권 구매 방법에서 해방되니 이제야 아름다운 베니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파란 하늘과 대운하를 사이에 두고 늘어선 오래된 수상 주택들, 그 운하를 지금 내가 시원하게 가로질러가고 있다. 이렇게 금방 다시 올 줄 몰랐는데. 정말이지 내가 혼자 베니스에 왔구나!
베니스의 골목으로 안내해준 다스베이더
숙소는 본섬의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주거지역에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저녁 식사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일단 밖으로 나와 숙소 주변을 계획 없이 돌아다녔다. 숙소 바로 앞 수로를 따라 작은 가게들이 늘어져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햇볕도 좋고 한적해서 딱 평화로운 오후 느낌! 그러다 웬 스타워즈 코스튬을 한 두 남자가 앞에 지나갔다. 그중 한 사람은 완전히 다스베이더 풀착장을 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게 왠지 멋있기도 했다. 카니발 기간이어서 종종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보였는데, 이들은 왠지 독특해서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따라갔다. 왠지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재밌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다스베이더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슬로 모드로 아직까지 내 기억에 생생하다.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휘적휘적 빠르고 큰 보폭으로 베니스 골목골목을 가로질러 가는데,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저 멀리 가 있어서 살짝 뛰어야 했다. 베니스 골목길이 워낙 복잡해서 옆 골목으로 휙 가버려 내 눈에서 사라지면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갑자기 그들이 나의 여행 안내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혼자였다면 절대 가보지 못했을 베니스의 숨은 골목을 속속들이 가봤다. 그러다가 일반 집 같은 곳으로 쏙 들어가 버려 나의 미행(?)은 허무하게 끝났다. 기대했던 재미있는 무언가는 없었지만, 이 경험 자체가 엄청 즐거웠고 나를 베니스의 숨은 골목길로 안내해준 다스베이더에게 고마웠다. 이런 게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구나! 이 무계획하고 돌발적인 여행이 너무너무 신났다.
소소한 일에 느끼는 보람과 뿌듯함
다스베이더를 보내고 혼자 구경하다가 골목길에서 너무 예쁜 바를 발견했다! 마침 금요일마다 라이브 공연을 한다고 쓰여 있어서 이따가 다시 오려고 사진을 찍어놨는데, 걷다 보니 왠지 오늘 공연을 하는 건지 확인을 해볼걸 불안한 거다. 그래서 다시 찾아갔다. 구글에 이름을 검색하니 나오지 않았고, 워낙 골목 안쪽에 있어서 다시 찾아가기 어려웠는데, 왠지 오기가 생겨 꼭 찾고 싶었다. 그러다 다시 바를 찾은 순간 너무 기뻤다! 혼자 여행하다 보니 이런 소소한 일에도 뿌듯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 이따 저녁때 혼자라도 꼭 가야지.
매 순간을 집중과 용기로
한참 돌아다니다가 그 안내자들을 또 만났다. 이번엔 세 명이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서 아쉬웠다. 처음 봤을 때도 사실은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망설이는 바람에 훨씬 앞으로 가버려서 타이밍을 놓쳐 못 찍었었는데.. 여행을 하면 매 순간이 다시는 못 올 순간들이어서 지나치면 그대로 영영 끝이다. 그래서 순간에 항상 집중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 다음엔 사진 찍고 싶거나 그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용기 내서 다 시도해야지!
사랑이 넘치는 도시
발렌타인데이여서 더욱 그런 걸까. 베니스는 정말이지 사랑이 넘치는 도시다. 수상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본섬에서 내가 처음 마주한 장면은 마치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키스하는 연인이었다. 그때까지는 밸런타인데이인 줄은 몰랐는데, 도시 곳곳을 다니니 여기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초콜릿, 선물을 많이 판매하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 꽃을 들고 가는 남자, 꽃을 받고 기뻐하는 여자의 모습,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을 엄청나게 많이 보았다. 광장에서는 황홀한 축제가 펼쳐지고 도시 곳곳에서는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다!
이름 모를 다리 위에서 바라본 노을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저녁을 먹으러 숙소로 돌아가는 길. 노을이 지기 시작하길래 숙소 가는 길에 있는 많은 작은 다리 중 한 다리 위에 멈춰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온세상이 보라색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광장은 카니발로 시끌벅적 엄청나게 활기찬데 조금만 안으로 들어오면 정말 한적하고 평화롭다. 4년 전에 왔을 때는 몰랐던 모습이다. 그땐 주로 관광지에만 있어서 베니스는 아주 활기차고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주거지에 숙소를 잡고 골목골목을 다녀보니 또 다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멀리서 종탑의 종소리가 들리고, 하나둘 지나다니는 사람과 그들의 일상적인 풍경을 구경하면서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노을을 즐겼다.
여행에서 동행을 구한다는 건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침 혼자 여행을 온 언니가 있어서 내가 찾았던 그 바에 함께 갔다. 약간 어색하고 혼자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바가 숙소에서 꽤 멀어서 혼자 가면 무서울뻔했다. 여행 동행을 구하기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여행을 오기 전 서울에서 유랑을 통해 동행을 구해보았다가, 일정 맞추고 연락하는데 스트레스를 느끼던 참에 마침 상대의 여행 일정이 변경되어 파투가 났었다. 그 이후로 이번 여행은 동행을 구하지 않고 혼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밤에는 혼자 나가기가 조금은 무서워서 첫날 바로 동행을 구해버렸다. 혼자 자유롭게 다니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때로는 같이 가고 싶기도 하고. 혼자 하는 여행 1일 차지만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와 아쉬운 점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다스베이더를 만나 하는 혼자 하는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고, 저녁에는 문득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왔다면 정말 좋았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차 적응 하나도 없이 폭풍 슬립!
2020. 2. 14 ~ 3. 11
퇴사 후 떠난 27일간의 유럽여행 일기를 꺼내 읽어본다.
복잡한 마음을 가득 품고 간 '퇴사 후' 여행이었는데, 다시 꺼내 읽어보니 다신 없을 '코로나 이전' 여행기로 다가오는 27일간의 유럽 여행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