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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Jan 23. 2021

무작정 떠난 쿠바 여행 18. 로컬 느낌 물씬 비냘레스

시가 농장, 생코코넛 주스, 도미노 게임, 승마까지, 저렴하고 다채로웠던

아바나에서 크게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비냘레스는 원래 내 계획에 전혀 없던 곳이었다. 뭐, 언제부터 내 여행에 계획이 있었냐마는. 하지만 대충 가고 싶은 도시는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때문에 아바나, 바라데로, 트리니다드 정도로 압축시켜 놨었는데, 마지막 아바나 일정을 없애다시피 하면서까지 갑작스럽게 추가한 곳이 비냘레스다. 그 이유는 카우치서핑을 통해 연락 온 레오 덕분. 카우치서핑이 어려운 쿠바라서 평소대로라면 굳이 선호하지 않는 ‘퍼블릭 트립’ 게시물을 올려뒀었는데, 그걸 본 레오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그는 아바나 근처에 있는 비냘레스에 사는데, 시간이 된다면 꼭 들러보길 추천한다며 비냘레스에서 할 거리를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게 꽤나 매력적으로 들려서 레오네 까사에 묵기로 하고 2박을 비냘레스에 할애했다. 짧지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이곳은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작고 소박한 시골이었다. 오죽하면 도로가 마을 전체에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나 외에도 오스트리아에서 온 부부 필립과 제니가 네댓 살 먹은 아들 누누와 함께 레오네에서 머물고 있어서, 우리는 다 함께 레오를 따라 비냘레스 구경을 시작했다.



레오는 집에서 멀지 않은 토바코 농장에 우릴 데려가 모든 걸 무료로 보여주었다. 시가 만드는 걸 직접 눈앞에서 본 후 어떤 맛인지 느껴보라면서 한 개비씩 우리에게 건넸다. 담배라면 질색하는 내가 망설이는 와중에 필립과 제니는 선뜻 하나씩 받아 들어 피우기 시작했고, 과연 쿠바 시가라며 감상평을 늘어놓자 나의 팔랑귀가 슬며시 관심을 표했다.


‘쿠바까지 왔는데, 시가 정도는 체험해봐야 하지 않겠어?’


여행을 하면 일상과는 다른 스스로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평소대로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도 선뜻 도전해보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마법의 주문에 이끌려서.


시가든 담배든 어떻게 피우는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는 내가 우물쭈물하자 레오는 시가에 불을 붙이며 설명을 곁들였다. 절대 들이마시지 말라고 뱉어내야 한다는 신신당부가 있었다. 잔뜩 겁먹은 나는 시가를 물고 사진을 한 장 찍고는 짧은 숨을 내뱉은 후 곱게 내려놓았다. 필립과 제니는 그새 다 타버린 시가를 들고는 나보고 정말 다 피운 거냐고 의아한 듯 물었다. 여담이지만 여긴 시가가 정말 저렴해서 6개비에 5달러밖에 안 한다. 나도 한 팩을 사서 여행을 마치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줬는데, 나중에 규록이는 담배 피우듯 들이마셨다가 다음 날 내내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고 불평했다. 그 말을 듣고는 일찌감치 포기했던 나 자신에게 감사했다는 후일담.



“생 코코넛 주스 마실 사람?”


시가 농장 투어를 마치고 다시 까사로 돌아가자, 레오가 목마르지 않냐며 우리를 뒷마당으로 인도했다. 정글처럼 온갖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그곳에서, 그는 긴 장대를 들더니 코코넛 나무의 가지를 마구 후려쳤다. 거대한 연둣빛 코코넛이 하도 위험해 보여서 괜찮은 거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게 일상이라고 가볍게 답하며 기어이 코코넛 네 개를 따냈다. 곧바로 칼을 꺼내 윗부분을 파내고는 빨대까지 꽂아서 주는 레오를 보며 이게 바로 자연인이구나 싶었다.



그날 밤은 누누를 재우고 나온 필립, 제니와 함께 거실에 앉아 레오에게 도미노를 배웠다. 쿠바에서는 도미노가 마작 같은 존재라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서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도미노라고는 줄줄이 세운 후 넘어뜨리는 그것뿐이었는데, 레오는 우리에게 게임 룰을 설명하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사실 온종일 쑥스럽고 온화한 성격만 내비친 레오였으나 이때만큼은 우리 모두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지 레오의 엄청나게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술과 게임은 없던 경쟁심리에도 불 붙이는 게 틀림없다.



비냘레스의 수많은 로컬 체험 중 마지막은 바로 승마였다. 예쁜 골짜기 풍경으로 유명한 이 동네는 말을 타고 구경하는 게 최고 인기 코스. 아직 어린 누누가 엉덩이가 아프다며 괴로워하긴 했지만, 레오 덕분에 단돈 5달러에 승마 체험까지 마치고 일주일같이 꽉 찬 2박 3일을 알차게 보냈다. 왕복 버스비, 숙박비, 식비, 액티비티 전부 합쳐서 든 비용은 겨우 7만 8천 원. 아바나, 바라데로, 트리니다드, 전부 좋은 기억이 한가득이지만 예상치 못하게 일정에 들어와 쿠바의 로컬스러운 면을 보여준 비냘레스는 내게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카우치서핑을 통해 레오가 연락을 주지 않았더라면 전혀 몰랐을, 감사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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