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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Feb 16.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9. 새해맞이

[칠레,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새해를 보내기로 한 칠레 북쪽의 사막 마을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살타에서 버스로 9시간이 걸리는 비교적 ‘짧은’ 여정이었다. 정말 작은 마을인지라 자넷은 살타에 새해까지 머물라고 설득했으나, 내가 이곳에 온 건 특별한 전통이 있다는 걸 들어서였다. 그렇게 나는 2018년의 마지막 날, 아타카마에 도착했다.


마치 시골 할머니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미로 같은 흙담길을 걸어 호스트 보리스네 집을 찾았다. 번지수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집들 사이에서 겨우 그를 찾아내자 따뜻한 가족이 나를 맞이했다. 와인이 유명한 칠레답게 우린 만나자마자 와인부터 깠고, 이후 전통 술인 피스코 한 병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밤이 늦길 기다렸다. 이윽고 자정이 다가오자 그의 친척 집으로 향했고, 대가족이 모여 앉은 그곳엔 성대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문 앞에 놓인 허수아비 인형. 나는 이것을 보기 위해 무리해서 칠레까지 왔다.



아타카마의 새해 전통은 자정에 헌 옷가지로 만든 인형을 태우는 것. 지난 한 해의 고난과 불행을 전부 태워버리고 새로운 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생긴 전통이라고 한다. 열두 시가 되자 온 가족이 우르르 밖으로 향했다. 나무 의자에 처량하게 놓인 인형에 불을 놓고 샴페인을 터뜨렸다. 각자 한 잔씩 나누어 받고 크게 건배를 외치자, 골목 사이사이 다른 집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뒤로는 커다랗게 폭죽이 울려 퍼진다.


보리스의 이모가 집에서 깨끗이 씻은 포도를 꺼내와 한 명씩 나누어 주셨다.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도 행한다는 이 전통은, 새해에 포도를 딱 열두 알만 따 먹는 것이다. 한 알당 새해의 한 달씩,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포도 열두 알에 샴페인을 곁들여 마시며,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인형을 의자가 재가 될 때까지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새벽 한 시 반, 의식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만찬을 즐겼다. 맥주, 피스코, 럼… 끊임없이 나오는 술을 잔뜩 마시고 나자 보리스의 친척들은 벌써부터 지치면 안 된다며 겁을 주었다. 새해 파티를 밤새 즐겨야 한다는 말과 함께. 아, 아르헨티나의 악몽이 살아나는 것인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새벽 세시,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보리스는 술을 챙겨 들고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이곳 사람들은 동이 틀 때까지 사막에서 춤을 추며 파티를 한다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당최 어디로 가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는 용케 사막 한복판의 파티로 가는 길을 잘 찾았다. 황량한 모래 언덕 아래, 캠프파이어를 둘러싸고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좀비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춤 추기를 한참, 언덕 위로 올라가서 일출을 넋 놓고 바라보기를 한참,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가 시체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갔던 것 같다.



느지막이 일어난 1월 1일의 오후엔 또 다른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타카마 사막의 인기 여행지 달의 계곡에 가는 투어를 전날 예약하려다 실패한 터였는데 보리스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계곡 근처에서 내린 후 보리스의 안내를 따라 사막 구경을 했다. 멋진 사진도 찍고 높은 곳에서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잠시, 보리스가 별안간 등산로를 이탈해 돌 틈으로 쏙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허겁지겁 따라가 보니 그는 돌산 사이로 내려가 사막 위를 걷고 있었다. 가이드도 없이 이렇게 허허벌판 사막 한가운데에 덜컥 들어가도 되는 건가 망설여졌지만, 해맑게 웃으며 손을 휘젓는 보리스의 모습에 나도 꼼짝없이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걸어서 집까지 갈 거야.”


“어… 얼마나 걸리는데?”


“한 시간? 금방이야.”


물론 뻥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가리키며 거의 다 왔다고 연신 격려하던 보리스는, 지친 부하들에게 언덕만 넘으면 곧 매실나무가 있다고 꼬드기던 조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나 더 남았냐고 물으면 그는 어김없이 한 시간이라고 대답했으나, 끝없는 모랫길을 12km 걷고 나서야 우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해 첫날부터 팔자에도 없는 사막 횡단을 세 시간이나 한 후였다.


“넌 12km를 한 시간 만에 가는 재주가 있나 보구나?”


내가 흘겨보자 보리스는 이게 바로 ‘보리스 투어’라며 껄껄 웃어댔다. 그래, 보리스 투어 덕분에 2019년은 새해부터 아주 알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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