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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Jul 23. 2022

TV 보는 게 취미라고 왜 말을 못 해#2

밤의 생각: 글을 쓰다가

(▲1화에서 계속)


중학교 말미에 미국행을 결정했다. 나름 고강도의 조기 영어교육을 받아왔던 나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가서 영어는 문제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밟아 본 미국 땅이었다. LAX에 도착한 나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보안 검색대의 게이트를 지나가는데 삐삐- 다급한 경보가 울렸다. 덩치가 좀 있는 흑인 여성 요원이 와서 나를 가로막더니 뭔가를 물었다. 분명 영어였는데,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빠른 데다가 난생처음 들어본 억양이었다.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내 말을 심각하게 듣던 요원은 나를 사무실로 끌고 갔다. 결국 전신 수색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알고 봤더니 벨트 때문에 금속 탐지기가 반응한 것이었다...) '나 영어를 잘 못 하구나.' 그때 처음으로 실감을 했다. 


다행히도 호스트 가족은 날 위해 천천히, 정확하게 말을 해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온갖 종류의 인종이 다 섞여있던 캘리포니아의 공립학교에서 그런 배려를 바랄 순 없었다. 더군다나 쓸데없이 레벨 테스트는 잘 봐 버려서(역시 한국인은 시험에 강했다!) ESL 수업을 건너뛰고 정규 수업을 듣게 된 상황이었다. 사실 쓰고 읽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말하고 듣는 게 문제였다. 나는 현지인들의 영어가 잘 들리질 않았고 내가 가진 영어의 억양이나 발음이 현지 사람들에게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의사소통을 시도하려다가 몇 번 어색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자 나는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만 들었다. 교과서에 어차피 선생님이 설명해주는 내용은 다 들어있으니까. 수업 후에 도서관이나 집에서 열심히 예복습만 하면 수업은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시험에서는 늘 A를 받는데 여전히 영어로 무언가를 말하는 게 어려웠다.


친구들을 사귈 수 없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집에 일찍 돌아와 TV를 봤다. 그때 내가 살던 호스트 가정에는 디즈니 채널이 나왔다. 만화뿐만 아니라 <The Suite Life of Zack & Cody>와 같은 어린이(?) 드라마가 꽤 많았는데 2-3편을 연달아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아도 애니메이션이나 어린이 드라마는 직관적인 내용이 많아서 내용을 이해하기도 쉬웠다. 디즈니 채널을 통해 나는 생활과 학교에서 써야 하는 필수 표현들을 조금씩 익히게 되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흘렀을까.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학교 선생님의 설명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어만 들리다가, 나중에는 덩어리 채로 들리고, 나중에는 이해가 안 가는 부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들렸다.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자, 특정 단어의 억양과 강세들이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외워버린 억양대로 영어를 내뱉자 다른 아이들도 내 영어를 훨씬 편하게 알아듣는 듯했다. 그 시점을 계기로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더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나름의 해피엔딩이다.


이후로도 나는 열심히 TV를 봤고 이제는 대체재가 된 OTT를 열심히 보고 있다. TV를 통해 영어를 배웠다는 사실 이전에 타국에서 홀로 외로웠던 나를 웃고 울게 해 준 유일한 존재가 TV였다는 사실을 종종 떠올려보곤 한다. 지금도 마음이 고단할 때면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통해 <프렌즈>나 <커뮤니티> 같은 미드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요즘은 아예 토요일 오전을 유튜브 보는 시간으로 정해놓았다. 평일에는 일하느라, 작업하느라 짬을 못 내니 아예 토요일 아침부터 보고 싶었던 콘텐츠를 몰아보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하다. 여전히 TV 보는 게 취미라고는 말 못 하지만, 토요일 오전만큼은 세상 근심 다 내려놓고 TV를 볼 수 있어 행복하다.


Photo by Yahor Urbanovic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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