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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Jul 17. 2022

TV 보는 게 취미라고 왜 말을 못 해#1

밤의 생각: 글을 쓰다가

종종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답이 있지만  밖으로 꺼내질 못한다. 티브... 결국 독서와 영화감상이라고 대답한다. 대답을 하고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하다. TV 보는  취미라고  말을  하냐고... 솔직하지 못한 답변을 정정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내적 갈등에 빠져있는 동안 이미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나는 언제부터 TV 보는 걸 부끄러워했을까. TV 시청은 수동적인 취미의 대표 주자다. 그냥 TV 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된다. 취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투박하게 느껴지는 행위다. 사회의 시선은 또 어떠한가. 'TV의 부정적 영향'을 검색하면 몇 만개의 논문과 기사가 검색된다. TV를 보면 눈이 나빠진다,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 폭력적이다 등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TV 많이 봐서 좋을게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는 꾸준히 TV를 봐왔다. 열심히 TV를 보던 어린이는 자라서 신문방송학과에 갔고 미디어 업계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이제는 TV 시청을 부끄러워 하기에는 조금 멀리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TV 보는 게 내 즐거움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나 자신에게 좀 더 당당해지고 싶어 지독하게 얽혀버린 TV와의 인연을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


나와 TV의 인연은 미취학 아동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엄마는 "나쁜 것"에 대한 꽤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이를테면 불량식품, 유행가, 염색은 엄마의 기준에서는 급이 낮은 문화였다. TV 시청도 마찬가지였다. TV를 보면 바보가 된다고 엄마는 누누이 말했다. 그리고 엄마가 금기시한 문화들은 우리 집 내부에서 절대 들여올 수 없었다.


당시 엄마는 내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해 하루에 5-6시간씩 연습을 시켰다.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운 어느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자유에 나는 들떠 있었다. 뭘 할까 고민하는데 안방에 놓인 TV가 눈에 띄었다. 'TV는 엄마와 함께 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어린 나에게 혼자 TV를 보는 행위 자체는 엄청난 비행이자 일탈이었다. 아무튼 그 운명의 날, TV를 이것저것 돌리다가 보게 된 만화가 <이상한 나라의 폴>이다. 인형의 몸에 요정의 혼이 들어간다든가, 어린이 만화답지 않게 극사실적인 대마왕의 모습이라든가, 지금 돌이켜 보면 이상한 설정이 많은 만화였다.


엄마 없이 TV 보는 짜릿함과 괴랄하면서도 자꾸 생각이 나는 이상한 만화의 중독성에 다음 날도 나는 같은 시간에 엄마 몰래 TV 봤다. 이후로 나는   달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상한 나라의 > 보는데 매진했다. 숙제를 핑계로 친구 집에 가서 보기도 했고, 대범하게 TV 소리를 죽여놓고 피아노를 치는 척하면서 TV 보기도 했다. TV 통해 방영되는 시리즈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 해본 최초의 기억이었다. 다행히 엄마에게는 전혀 들키지 않았다. 지금도 엄마는 "우리 애들은 TV 거의  보고 자랐어요." 이런 말을 종종 하신다.


그날을 시작으로 나는 하라는 피아노 연습을 안 하고 TV를 종종 봤다. <세일러문>, <천사소녀 네티>, <웨딩 피치>, <파이팅! 대운동회> 등 여자 주인공이 독립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을 주로 섭렵했다. 연습을 제대로 안 하니 당연히 잘 칠리가 었다. 중요한 콩쿠르를 앞두고도 TV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보는 집요함과 성실성에 내심 감탄도 했던 것 같다. 동시에 나는 피아노에 흥미도, 재능도 없다는 걸 슬슬 자각하기 시작했다. 10살이 되던 해, 음협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예선 탈락을 한 나는 이제 피아노는 그만 치겠다고 선언했다.


피아노와의 인연을 끊어준 고마운 TV는 이후로도 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


(2화에서 계속)


Photo by Ajeet Mestr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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