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하나, 낭만이 필요한 나이
서른하나, 소위 말하는 막차를 타고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워킹홀리데이는 대학을 가기 전부터 나의 오랜 꿈이었지만, 스물여섯 대학졸업과 함께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빛바랜 꿈들의 우주 속 하나의 별이 되어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어떤 하루에, 불현듯 이미 빛이 바래 아스러진 줄 알았던 그 별이 반짝 빛이 났다. 새벽 3시의 퇴근 길이 유난히 시려서였던 것 같기도, 그날의 밤하늘의 별들이 유독 반짝거려서였을지도, 혹은 퇴근길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스무 살의 나를 뜨겁게 만들었던 노래여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년 생일이 지나면 영영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덜컥,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해 버렸다.
낭만이 필요해요
“낭만이 필요해요” 5년 6개월, 내 이십 대 중후반을 모두 바친 직장생활은 그 말과 함께 정리되었다.
퇴직사유가 뭐냐 묻던 직장상사는, 내 대답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내 나지막이 알겠다고 말했다.
지난 5년 6개월 동안 나는 일에 미쳐있었다. 주변사람들은 입을 모아 왜 그렇게까지 일을 하냐 물었다. 직장상사마저 나를 볼 때마다 일 좀 그만하고 쉬라고 말했다. 나는 나의 일에 내 젊음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왜 그랬는지 묻는다면, 그냥 일이 너무 좋았다. 함께 일하는 직장상사와 동료들도 너무 좋았고,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에너지는 더 좋았다. 퇴근해서 홀로 보내는 시간보다, 출근해서 함께 일하는 시간이 더 행복했다.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었다. 일요일 저녁마다 친구들이 내일 출근하기 싫다고 몸서리를 칠 때, 나는 출근이 기다려졌으니 그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건 다시 생각해도 분에 넘치는 행운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처해서 야근을 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일을 하고, 그래서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을 하고, 승진하면 일과 책임감이 느니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5년을 일했다.
5년 차가 되자 고민이 시작됐다. 앞으로 이곳에서 5년 더 일하면 앞으로 나의 남은 30대와 40대 모두 같은 일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대에도 40대에도 이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봤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나의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문득 내 삶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웠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 채광이 잘 들어오는 혼자 살기에 충분히 큰 집, 만족스러운 직장, 5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적금들. 하지만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진짜 원하던 삶이었나? 항상 출근하던 어느 일요일에 아무 약속도 잡지 않고 출근도 하지 않아 보았다.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이라는 시간이 갑자기 너무 광활하게 느껴졌다. 마치 매일같이 공부할게 쌓여있다 수능이 끝난 수험생처럼 나는 나에게 갑자기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헤매었다. 아, 나는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렸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수동적 인간,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배고픈 인간이고 싶고,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고, 한 명의 조르바이고 싶었다. 내 삶에 무엇이 빠져있는지 나는 알아버렸다. 내 삶에는 낭만이 빠져있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해 놓고 나서도 망설이던 나는 그날, 낭만을 찾아 뉴질랜드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제 젊음을 낭비하고 싶어요
뉴질랜드로 1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 말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너무 멋지다며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 절반과, 서른 하나면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좀 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냐, 지금까지 쌓아놓은 커리어가 다 무너질 텐데 너무 아깝지 않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절반. 하지만 전자와 후자 모두 서른은 젊은 나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젊지 않은 나이에 쉽지 않은 도전인데 멋지다는 말과, 젊지 않은 나이에 이제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 왜일까? 백세시대에 서른은 아직 인생의 3분의 1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 우리가 90까지 산다고 해도 이제 막 3분의 1 지점을 지나온 것이며, 70까지 산다고 해도 아직 절반도 채 되지 않은 나이인데 말이다. 나에게 서른 하나는 젊다 못해 너무 어린 나이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거 아니야?” 친구가 말했다. 그런가? 고민했다. 내가 지금 도피하는 건가? 직장생활에 지쳐 도피하고 싶은 건가? 그러다, 도피여도 뭐 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피면 뭐 어때, 10년을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30년을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기나긴 인생에 단 1년뿐인데 1년 정도 도피하더라도 그게 무에 그리 큰일이겠어. 친구는 젊음이 아깝다고 했다. 낭비할 젊음이 있을 때 나는 내 젊음을 마음껏 낭비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퀘스트 깨듯이 쌓여있는 할 일들을 해치우고, 조금 더 유능한 인재-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가며 끊임없이 뭔가를 새로 배우고, 하루 24시간을 초단위로 계획하며 시간과 젊음을 한치도 낭비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정작 나는 내 젊음을 나를 위해 쓰지 못했다. 모든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그래, 나는 내 젊음을 마음껏 낭비하고 싶었다.
어쨌든 뉴질랜드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지금, 뉴질랜드에 있다. 18년 된 아주 낡은 캠핑카를 하나 사서 캠핑카를 타고 뉴질랜드 방방곡곡을 누비며 젊음을 마음껏 낭비하며, 낭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어느 여행자와 같이 예기치 않은 불운과,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사건사고들도 함께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가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