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를 꿈꾸는 앨리스들에게

서울 응암역,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by 유스

가끔은 삭막한 벽에 새하얀 분필로 네모 난 문을 하나 쓱 그려, 다른 세계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치 영화 <판의 미로>의 소녀 오필리아처럼.


물론 현실의 나에겐 오필리아가 지녔던 마법 분필도, 그녀의 조력자인 요정 ‘판’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계를 직접 찾아 나서는 방법 뿐.


마법 분필 대신 [튼튼한 두 다리를 이끌고], 조력자 요정 ‘판’ 대신 [어마어마한 길치인 나를 안내할 스마트 폰을 들고서] 그리곤, 떠났다. 응암역에 있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으로.


간판도 없단다. 단서는 두가지 뿐.

하나, 서부경찰서 인근에 위치.

둘, ‘다봉’이라는 일식집 건물의 지하 1층.


응암역에서 느린 내 걸음으로 10여 분을 걸어, 경찰서 인근에서 찾은 한 건물. ‘이런 곳에 헌책방이 있겠어‘라는 생각을 노린 것 마냥, 썰렁하리만큼 평범한 건물 지하.

헌데, 지하로 들어선 순간, 직감했다. 나의 보이지 않는 마법 분필이 제대로 작동 했구나, 라는 것을.



이상북 내부 모습. 프로젝트 스크린, 넓은 테이블과 의자 등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북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다. 책꽂이에 빽빽이 놓인 책들만 봐서는 헌책방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서가를 장식한 수많은 장난감, 프로젝터 스크린, 한 몸이 되어도 좋을 것 같은 편안해 보이는 소파,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벽에 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정수기 옆에 놓인 각종 차와 간식 등.


헌책방답게 낡은 책들이 여기저기에 쌓여있다.


이쯤 되니 이상북을 부르는 다양한 수식어가 떠올랐다.


다수의 매체에 소개된 꽤나 유명한 헌책방, 박원순 시장 집무실을 디자인했고,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란 책 (헌책방과 똑같은 이름의)을 포함한 여러 저서를 낸 작가 윤성근님이 반겨주는 곳. 주인장 본인이 읽은 책만 팔고, 주인장이 직접 만들어주는 뱅쇼와 샹그리아를 마실 수 있는 장소. 가끔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전시회를 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며, 강좌를 열기도 하는 곳. 동네 꼬마들의 공부방이 되기도 하는 한편, 어찌 보면 독특한 홍대 앞 소규모 카페 같기도 한, 그런 정말 '이상한 헌책방'.


마치 자주 본 사람인 거 마냥,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주인장에게 뱅쇼 한 잔을 부탁했다. 가격은 3,000원. 달콤 쌉사름한 뱅쇼 한 잔을 홀짝 홀짝 마셔가며, 헌책방 특유의 묵은 냄새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주인장 윤성근 작가가 직접 만들어준 뱅쇼



이상북에도 그런 재미가 있었다. 마치 새 것인 척, 마냥 깔끔하게 손질된, 무늬만 헌책이 아닌, 정말 세월을 머금은 헌책. 노래진 책장, 여백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글자, 앞서 읽은 이의 숨길이 묻은 헌책.


그들은 마르크시즘, 문학, 역사 등으로 분류되어 책꽂이에 꽂힌다. 어떤 것은 1,000원짜리 ‘득템’용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신작의 느낌이 결코 나지 않지만, '금방 들어온 따끈따끈한 책들'의 책장에 모셔지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헌책방이라는 대전제에 어울리지 않게 ‘팔지 않는’ 책장에 꽂혀지기도 한다.(이 팔지 않는 책장에 꽂힌 책들에서 주인장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조금 있으니, 한 무리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들어섰다. 각자 책가방에서 숙제를 꺼내 무언가를 끄적이며, 오는 길에 사온 듯한 간식을 먹는다. 한 여자 아이는 선생님에게 학교 친구와의 고민을 털어놓고, 한 아이는 친구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동안 여유로운 침묵이 흘렀던 공기의 움직임이 변화하는 순간, 나는 느꼈다. 이곳은 더 이상 지하의 작은 헌책방이 아닌, 나의 작은 세계가 됐음을.


주인장의 여유로운 타이핑 소리는 그 공간을 채우는 완벽한 BGM이 되고, 에드워드 호퍼 Rooms by the Sea가 걸려있는 벽은 하나의 작은 갤러리가 된, 완벽한 세계.


호기심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었던 오필리아처럼, 토끼 굴이라는 낯선 장소에 떨어진 앨리스를 꿈꾸는 당신이라면, 이상북의 문을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Information

주소: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 89-2 B1

전화번호: 070-7698-8903

운영시간: 오후 3시~11시

휴무일: 매주 화요일과 일요일(국경일은 주인장 마음대로)

홈페이지 :http://www.2sangbook.com/


tip.

서가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며 차를 마실 수도 있는데, 이 모든 음료는 1,000원 가량의 저렴한 가격이며, 셀프 방식으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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