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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worker Jan 08. 2025

내가 참 사랑하는 작가


사랑하는 작가가 없다. 좋아하는 책과 글은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특정 작가를 유독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영화도, 음악도 그렇다. 10대가 지나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거나 그리워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저 멀리서 흐르는 물처럼 스쳐간다.


친구들은 있다. 마음이 가는 사람도 몇 있다. 그러니 성격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좋아하는 마음에도 색깔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허름한 중고책방에서 책 한 권을 찾았다. '건방을 밑천으로 쏘주를 자산으로'. 저자는 주병진. 


이상하다. 이 유치해 보이는 제목에 손이 먼저 움직인다.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 파동이 인다.


알다시피 그는 성공한 개그맨이자 대성한 사업가다. 무대에서는 웃음을, 시장에서는 속옷을 팔았다. 그를 작가로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겠지만 온전한 책 한권을 냈으니 그는 분명 작가라는 이름에 값 할 것이다. 그가 쓴 실패의 순간들은 무대 조명보다 선명하다. 그는 자기가 겪은 일들의 고단함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장면을 개그맨의 입담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무대 위의 주병진과 닮지 않았다.


이 책이 내게 특별한 건 어쩌면 1997년 11월 어느 밤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물넷의 나는 친구 집에서 라면을 끓여 식탁에 놓고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는 일촉측발의 IMF 외환위기를 떠들어댔다. 달러가 부족하다는데 왜 나라가 망할까. 취업이 힘들어진다는데 어떻게 버텨야 할까.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며 실없이 농담을 건넸다. "야, 우리 그냥 장사나 할까?" 친구가 장사는 아무나 하냐고 내게 핀잔을 주며 라면냄비를 들어올리던 그때, 받침대로 썼던 책 표지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개그맨이 쓴 책이라니 유머모음집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빌려왔다.


꿈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던 그때, 그의 이야기는 이상한 위로가 되었다. 그의 이백 만 원짜리 도전이, 결코 쓰러지지 않는 고집이, 내 안의 무언가를 흔들어 놓았다. 나도 그처럼 무모해도 될까? 그때 비롯된 질문은 지금도 종종 나를 자극한다.


고책방의 책먼지에 재채기를 하며 누렇게 변한 종이를 넘긴다. 해묵은 시간의 냄새가 올라온다. 현재의 나를 그 시절의 내게 투영해 본다. 그는 늙었고 나도 변했다. 하지만 이 책의 문장들은 주름지지 않았다. 여전히 투박하고, 그대로 서툴다. 그래서 오히려 무정할만큼 정직하게 읽힌다.


사랑하는 작가가 없다. 그래도 이 책은 조금 특별하다. 작가의 이름이나 위로의 메시지때문이 아니다. 좌절해도 괜찮고, 서툴러도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이 책이 처음 알려줬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낙담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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