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이 바뀐 건 하루아침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하루 밤중이었다. 모두가 잠든 사이, 조용히, 그러나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정치는 종종 새벽에 움직인다. 그것은 이 나라의 전통이자 풍경이다.
문제는 포장이다. 마치 썩은 우유를 새 포장지에 싸서 새벽배송한 듯, 교체의 정당성은 ‘절차’라는 단어로 감싸졌다. 떠나는 이는 “쿠데타”라 외쳤고, 남는 자들은 “당헌과 당규에 따른 합리적 절차”를 읊조렸다. 전자는 퇴장음이었고, 후자는 면피용 배경음악이었다. 명분 없는 전환, 설득 없는 등장, 그것을 우리는 정치라 부를 수 있을까.
정당은 스스로를 연극의 무대로 착각하고, 유권자는 조용히 그 관객석에 앉아 박수를 치길 요구받는다. 하지만 이 연극은 갈수록 허술하다. 대본은 자주 바뀌고, 연기력은 형편없으며, 배우는 관객의 선택이 아닌 연출진의 심야 회의로 정해진다. “절차는 지켰다”는 말은 종종 “당신이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번역된다.
더 황당한 건 이 교체극의 주연들이 경쟁 무대를 향해 “품격이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장면이다. 자기 발연기를 모른 채, 남의 무대 조명을 문제 삼는 모습은 유머를 넘어 아이러니다. 이쯤 되면 거울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세상이다. 아니, 거울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희극 속에 갇혀 있다. 웃기지도 않고, 감동도 없으며, 심지어 끝날 기미도 없다. 매 시즌 배우만 바뀌고, 줄거리는 늘 같으며, 관객은 언제나 무대 책임을 지게 된다. 유권자는 투표를 통해 배우를 고른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대 자체를 승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슬픈 건, 우리가 어느새 관객이 아니라 출연자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치 않는 조연이 되어, 어설픈 장면의 배경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 투표는 과연 이 쇼에 자발적으로 출연하겠다는 동의였을까. 아니면, 무대 자체를 갈아엎겠다는 침묵의 사인이었을까.
정치는 책임의 예술이다. 그러나 이 무대에서는 책임이 연기되고, 책임지는 이는 늘 관객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밤은 깊고, 무대는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