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의 휴식.
회사를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나온 지 3주가 지났다. 3주 동안 나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내가 읽는 글이라고는 가끔 오는 안부 메시지들과 뉴스가 전부였다.
취준생으로 돌아가는 시기가 오면 보통은 회사를 다닐 때 보다 더 바쁘게 보냈다. 해야 할 일이 늘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백수일 때가 회사원일 때보다 늘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는 했다.
이번 퇴사 후에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다녀왔고, 혼자서 에버랜드도 다녀왔고, 연극을 보러 다녀오기도 했다. 중간에 어두운 머리를 하긴 했었지만 거의 4년 동안 탈색머리였던 내 머리도 차분한 색으로 바꿨다. 회사를 취업해야 하거나 가족의 결혼식으로 인해 단순히 잠깐 톤다운했을 때는 그렇게도 어색하고 싫었던 머리가, 자의로 선택하니 나름 괜찮아 보였다.
마침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밖에서 새벽까지 술을 먹기도 했고, 친구들과 비싼 킹크랩과 대게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주말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잠을 자고 보고 싶었던 미드와 다큐멘터리, 공포영화들을 연달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질러졌던 집안을 치우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가끔 아침에 나가 운동도 했다. 계속하려다가 미루기만 했던 파김치와 나박김치를 담그고 모든 게 다 있다는 다이소에서 아크릴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사슴 그림을 걸어두고 싶었어서 보석 십자수도 시작을 했고, 조카들을 위해 뜨개질도 시작해서 하루 만에 다 끝내버리기도 했다. 마침 새로 업데이트된 동물의 숲을 계속하기도 하면서 이번엔 노동의 숲이 아닌 정말 힐링의 숲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입원으로 인해 엄마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엄마와 함께 살았던 집에서 옆사람까지 셋이서 술을 한잔 하고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만 찍던 셀카를 셋이서 찍기도 했다. 나는 엄마와 옆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웠었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온전히 나만을 위해 시간을 쏟은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평소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상태였는데 지난 3주간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다 보니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하고 있었지만 글을 쓰기 싫기도 했다. 이 3주간 타인에게 또 나에 의해 상처 받은 내 마음을 다독이는 동안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고 내 글은 나를 위로하는 것 중 하나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쓴 글을 내가 읽으면서 다시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노트북 앞에 앉지도 않으려 했다.
하지만 글을 더 편하게 쓰기 위해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키보드를 샀고, 다 써가는 수첩이 눈에 보여 새로운 수첩을 샀다. 늘 가지고 다니던 토이스토리 펜에서 버즈가 떨어져 버려서, 이번에는 팬더곰이 붙어있는 귀여운 펜도 구매했다. 귀여운 것을 꽤나 좋아하는데 팬더곰은 특히나 좋아해서 에버랜드에서 3번이나 팬더곰을 보기도 했고 세일하는 스노우볼을 사고 이케아에서 작은 팬더곰 인형을 하나 더 사 왔다. 내 침대에는 총 4마리의 팬더곰(일팬이, 이팬이, 삼팬이, 사팬이)가 함께 있다.
지난주 상담에서 다시 글을 쓰려한다고 이야기했다. 마음이 단단해진 것 같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단단해졌다.'라는 말에 기분이 다시금 나아졌다. 나아지고 있었지만 훨씬 더 나아진 느낌이었다.
이번 주 월요일부터 여러 채용 사이트에 이력서를 공개로 전환하고, 괜찮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사실 괜찮은 일자리라는 게 존재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디를 찾아도 전 직장보다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이면 30대 중반이 되고, 한 가지 분야의 일만 했던 게 아니라서 생각보다 일자리를 찾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경력직으로 들어가기엔 조금 부족하고, 신입으로 들어가기엔 내가 여태까지 받아왔던 연봉이나 나이가 걸리고 있다. 아예 새로운 분야를 시도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냥 적당히 일하면서 적당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택하기로 했다.
마케팅 일을 구한다는 곳에 월요일에 이력서를 넣었고, 바로 연락이 와서 화요일에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을 보러 간 순간부터 '여기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핸드폰으로 크게 노래를 틀어두고 있었고, 면접을 보는 중에도 따로 조용한 공간 없이 그저 파티션 안에서 시끄러운 노래를 배경으로 면접을 봤다. 아마도 면접 내용이 공개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래를 튼 것 같았지만 호프집도 아니고 이런 분위기의 면접은 처음이었다. 업무도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이 아닌 영업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직 두려운 나는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영업직이 맞지 않는다. 그래도 면접을 보러 갔으니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고 돌아왔다. 마케팅 자리는 인원 충당에 대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없었다고 했지만 집에 돌아온 뒤 합격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출근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력서를 공개한 이후로 꽤나 많은 전화와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내가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어째서 10년 전과 지금의 급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지 궁금하다. 물가는 미친 듯이 상승하는데 월급은 그대로인 이 세상은 역시 미쳐 돌아가고 있다.
주식 컨설팅 일을 해보자는 제안에 나랑 맞지 않는다고 얘기하자, 일반 직장인 월급으로는 집도 사지 못한다며 면접 제의를 하길래 나는 이미 집이 있다고(물론 반이 대출이지만) 이야기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기본 시급을 주겠다며 복사 같은 간단한 일만 하라는 전화, 보험 영업, 고객 상담, 부동산 등등 많은 전화가 왔지만 나랑 맞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적당히 일 하고 싶지만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최대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일을 하고 싶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업무를 적응해 나가는 동안 나에게 또 어떤 일들이 닥칠지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새로운 시작이 두렵다.
다만 단단해진 내 마음이 다시 고통과 슬픔으로 무너지지 않기를,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신중하게 일을 찾고 있다. 통장의 잔고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만나서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지는 않다.
겉보기에 괜찮은 직장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시작만큼은 괜찮게 하고 싶다. 나에게 또다시 상처를 준다면 그때의 나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버티는 게 아니라 괜찮아지고 싶고, 이 상황을 유지하고 싶다.
당분간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면접을 보고 또다시 이력서를 넣는 일을 반복해야겠지만,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는 괜찮아졌다. 요리를 하는 것이 다시 즐거워졌고, 싫어하던 청소도 마음을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 꽤나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침에 듣는 라디오도 DJ를 향해 보내는 읽히지 않을 메시지도 꽤나 설렌다. 우연히 당첨된 이벤트 상품으로 받은 피크닉 세트도, 라면 세트나 커피 교환권도, 차가운 새벽 공기도, 직접 내려먹는 커피도, 즐겨보는 현대사 시사 교양 프로그램도 다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조금 이르게 설치한 트리도, 온종일 틀어놓는 캐럴도, 올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조금은 설렌다. 올해 초에 막연하게 '올해는 최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11월의 끝자락을 코앞에 둔 지금, 다행히 아직까지 올해는 꽤 괜찮게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힘든 순간도 있었고, 지치는 순간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나를 조금 더 알게 됐고, 내게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그들 혹은 그것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됐다. 얼굴도 모르는 독자님들의 덧글로 위로를 받고, 계속해서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오롯의 나만의 공간을 즐기는 것도 날 위로해준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나는 글도 다시 쓰기로 했고, 다시 읽기로 했고, 나를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이 많았다고 수고했다고 다시 매일 저녁 나를 다독이기로 했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