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장기 펜싱시합을 회상해 보는 중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모범생, 우등생으로 살아왔다. 항상 잘한다기보단 최선을 다하는 포지션이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최상위권은 아니었던 그런 학생이었다.
으뜸은 되지 못한 버금 정도
나의 펜싱도 그러했다.
아, 그보다 못했다. 예선 전패를 한 적도 있고, 전체적으로 이긴 것보다 진 게 더 많았다.
역시 난 예체능의 재능은 없나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엔 펜싱권태기가 오기도 했다.
‘이걸 해서 뭐 하지,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는데...’
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진짜 하고 싶어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반복되는 주 3회, 일상이었다. 어딘가 텅 빈 듯 공허한 마음으로 그냥 하니까 하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기량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작업량이 많아 피로도가 증가했고, 2주 연속의 행사에 신경 쓸 일도 많아진 게 원인이었겠다.
레슨을 받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날도 있었고, 마음에 드는 포인트가 하나도 없는 날도 많았다.
어쨌든 나의 모교가 있는 지역이라 시합은 나가기로 마음은 먹었다. 성심당과 피자를 먹으러 간다는 핑계로 말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비척거리며 일어나 어찌어찌 시합장에 도착하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풀고, 같은 클럽 회원님들을 응원하다 보니 어느새 나의 예선 경기가 시작되었다.
분명 아침에 몸을 충분히 풀었는데. 땀도 꽤 흘리고 긴장도 풀린 줄 알았는데. 나의 예선 결과는 1승 4패였다.
(예선 뿔 명단을 보고 코치님은 내가 전승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두 번째 경기부터는 눈물을 꾹 참고 게임을 뛰었다. 위에서 소리치는 코치님이 꽤나 원망스러웠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고, 몸은 안 움직여 속상하고, 괜히 감정이 상했다.
어쨌든 1승이라도 해서 턱걸이로 본선에 진출했다. 15포인트, 처음 보는 상대. 내 결정에 자신이 없던 나는 코치님의 아바타가 되기로 했다.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래도 출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코치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전술을 그대로 실행했고 16강, 8강을 이겼다.
그리고 4강. 내 펜싱 중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지난 시합 4강에 이어 다시 올라온 4강.
상대 경기를 봐온 코치님이 말하길 상대는 굉장히 빠른 스타일이라 했다. 막을 거면 제대로 막고, 피할 거면 제대로 빠르게 피해야 한다고.
아떻게 뛰었는지 기억도 없을 만큼 열심히 뛰었다. 점수차이가 크지 않아서 집중해야 했고 그 순간에는 숨을 참고 공격을 했다.
동점에서 1점, 2점. 나의 점수가 올라갈 때마다 첫 결승을 밟아볼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포인트, 나의 불이 들어오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게 진짜 실화 맞나..? 꿈인 거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결승에 들어가기 전, 잠시 숨 고를 시간 동안 코치님과 작당모의를 했다.
상대는 빠른 스타일이니까, 아까보다 더 확실히 빠르게 피해야 한다.
할 거면 더 빠르게 가야 한다.
빠르게, 더 확실하게.
이 두 마디를 중얼거리며 다시 마스크를 썼다.
상대를 한 번도 앞서지 못한 나의 점수. 과거 다른 시합에서 5:0으로 진 적이 있는 상대였기에 마음속에선 잔뜩 겁을 먹었다.
다행인 건 나의 판단이 옳았던 포인트가 있었다는 것. 코치님의 지시가 아닌 나의 결정으로 칭찬받은 포인트가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결과로는 15:11로 패했다.
승패도 중요했지만 코치님 믿고 결과를 만들어내서,
첫 결승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꽤 점수를 내서 다행이었다.
나의 첫 결승은 그렇게 끝이 났다.
버금가다.
한 뮤지컬에서 잠시 지나가는 씬으로
‘역시 이 시대의 버금가는 작가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그 장면이 꽤나 눈부셔서 그랬나, 버금이라는 말이 싫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