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즉흥과 우연

현대미술의 이단자들: 마틴 게이퍼드

by 조 씨

1940년대 중반 이전에 프로이트가 베이컨의 작품과 심지어 그의 이름을 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다.

돌이켜 보면 전후. 영국 회화는

1945년 4월

런던 르페브르 갤러리에서 열린 단체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불 수 있는데, 베이컨은 이 전시에 두 접을 출품했다.

그중 하나가 삼면화

" 십자가 책형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 1944년경으로, 현재 테이트에 소장되어 있다.

전시 관람객들은 베이컨의 그림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존 러셀의 표현에 따르면 베이컨의 작품은 '대경실색'을 일어줬다. 중앙의 형상은 해부학적으로 털 뽑힌 타조와 유사한데 인간의 입을 가졌으며, 길고 두꺼운 관 모양의 목 부분에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다.

짝을 이루는 양쪽의 형상처럼 궁지에 물려 있으며

"오로지 목격자를 자신의 수준으로 몰락시킬 기회만을 노리며" 공격받고 있는 듯 보였다.

여기서 "이미지는 시종일관 무시무시하여 보자마자 정신이 뚝하고 끊어진다."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충격을 안겨 줬겠지만 간과하기 어려운 예술이었다.
악몽은 신 낭만주의 작품처럼 풍경 속에 눈에 띄지 않은 채 그저 도사리고 있지 않고, 바로 눈앞에서 거대하고도 가공할 존재로 보는 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당시 베이컨은 같은 세대의 몇몇 영국 미술가와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베이컨이 거리낌 없이 인정하듯이 그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대상은 피카소였다. 이는 비단 베이컨에게만 국한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또 다른, 영국 미술가 들도 역시 피카소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사실상 빅토리아 시대의 살롱 회화의 후예들을 제외한 영국(그리고 유럽)의 거의 모든 미술가가 피카소의 작품을 자유롭게 차용했다.
피카소의 후기 입체주의 정물화를 취해 힘과 에너지를 제거하고 매력과 재치로 대체하거나 피카소 예술의 감정적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공격성과 성적 폭력성, 순전한 잔인성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동료 영국인들의 경향을 보여 주며 베이컨의 특별한 점은 그가 이런 특성들을 누그러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오히려 베이컨은 그 특성들을 강화했다.

베이컨은 다른 어느 미술가보다 피카소가

"우리 시대정신에 대해 내가 느끼는 바와 가깝다"라고 말했다.
훗날 베이컨은 피카소 작품과의 조우가 그가 미술가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베이컨은 열여섯 살 때 목적의식 없고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뚜렷한 재능이 없이 보이는 불안정한 십 대 청소년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나이 많은 동성 애인을 매혹하고 이용하는 능력뿐이었다. 하지만 한 참 뒤 그의 회상에 따르면,

젊을 때 방황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아와 진정한 목표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베이컨은 대위 출신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발각당한 뒤 격렬한 언쟁 끝에 아일랜드 집에서 쫓겨났고 그 뒤 유럽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1927년 프랑스에서 미술 작품을 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북부 샹티이의 콩데 미술관에서 본

니콜라 푸생의 (유아 대학살) (1628년경)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푸생의 작품은 경구와도 같은 고전적인 형태로 정제한 무자비한 잔인함의 이미지를 보여 주었다.

베이컨이 파리에서 본 피카소의 드로잉 전시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전업 미술가 중 상당수가 어릴 때부터 그림과 드로잉 하기를 좋아하는데 베이컨은 학창 시절에는 미술에 흥미가 거의 없었다.
동시대인들에 따르면 그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를 화가로 만들어 준 각성은 최고 수준의 그림을 접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경험이 궁극적으로 그가 두 가지 대담한 결심을 하도록 이끌었다. 하나는 선행 교육을 받지 않았고 소질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시도해 보겠다는 결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장 뛰어난 대가들과 겨루고 푸생과 피카소의 수준을 목표로 삼지 않는 한 그림 그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었다.

좋은 화가가 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역설적이게도 얼핏 보면 베이컨은 많은 시간을 샴페인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데 소비하는 아마추어처럼 보였지만 그림에 대해 가졌던 이 진지한 자세가 베이컨이 동시대의 많은 미술가와 다른 점이었다.
(십자가 책형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이 전시된 지 약 2년 뒤 아우어바흐가 런던 미술계에 등장했다. 그는 다소 태만한 아마추어리즘이 자신이 접했던 윗세대가 빠지기 쉬운 죄라고 진단했다
그에 반해서 베이컨은 작업의 유일한 핵심은 걸작을 만드는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가 이제껏 그린 모든 작품을 전멸시킬 그림을 꿈꾸었다. 그에게 난관은 그가 그린 그림 대부분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베이컨은 연애 상대를 물색하러 가는 파리의 어느 술집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말하는 한 남성을 만났다. 베이컨은 그 의견에 감동받았고 실제로 그것을 삶의 신조로 삼았던 것 같다. 그는 대부분의 예술가보다 훨씬 더 깊은 수준으로 자기 자신을 창조했다. 게다가 베이컨이 즉흥적으로 시작한 경력은 초반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처음에 그는 바우하우스 디자인과 매우 진보적인 파리의 실내 장식풍을 추구하는 현대 가구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자신이 디자인한 가구로 얼마간 주목을 받자 베이컨은 갑자기 경로를 바꾸었다.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는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새로운 행보에서 놀라운 점은 비정규적인 교육을 얼마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여전히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베이컨은 열다섯 살 연상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부터 주제에 대한 정보를 얼마간 얻었다. 베이컨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로이 드 메스트르와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성 적인 차원의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술적 멘토링을 포함했다는 점은 분 명했다.

드 메스트르는 단지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미술에 대한 섬세한 이해력을 터득한 사람이 그것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한 유치하고 단순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방법에 대한 베이컨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드 메스트르는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미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베이컨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 결과 미술가들과 친구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 하긴 하지만 베이컨은 그림을 썩 잘 그리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이컨은 전적으로 영감에 의지했다.

이것이 그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

그는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그림을 그리는 법도 전혀 몰랐지만 매우 뛰어나서 순전히 영감만으로 어떻게든 그림으로 만들 수 있었다.
베이컨은 선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지만 물감, 즉 물감의 물성, 유동성, 작용에 대한 뛰어난 본능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흥분을 제외하면 이 점이

(십자가 책형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과 1945년 르페브르 갤러리에서 전시한 베이컨의 또 다른 작품 (풍경 속의 인물 1945)

이 돋보이는 이유다.

두 작품은 미술사 가들이 '회화적'이라고 지칭하는 부류에 속한다.

베이컨에 대한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한 가지 사실은 그가 물감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의 도처에는 물감이 있었다. 그의 작업 환경도 온통 물감 범벅이었다.

1940년대 베이컨은 런던 남서부의 중심지에 위치한 사우스켄싱턴 지하철역과 자연사박물관 사이 크롬웰 플레이스 7번지의 아파트 1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은 이전에 라파엘전파 존 밀레이와 이후

사진가 E. O. 호페 가 거주했던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주택의 한 부분으로, 빛바랜 화려함과 무질서 한 혼란이 뒤섞여 방문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동굴 같은 방을 채운 볼품없는 "친츠"와 벨벳의 소파와 침대 의자는 화가 마이클 위샤트가 느꼈던 것처럼 공 간에

"쇠락한 위엄의 분위기, 추락한 에드워드 7세 시대의 허망함"을 드리웠다.

그리고 깜빠 거리는 두 개의 거대한 워터퍼드 산 유리 샹들리에가 신비로운 빛을 비추었다.
마치 어느 고딕풍 연극 무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곳에서는 전통적인 가족에 대한 기이하고 전복적인 패러디가 벌어지고 있었다. 베이컨의 보호자이자 연인인, 연상의 부유한 남성 에릭 홀이라는 사람이 생활비를 지원했다.

그는 화를 내거나 거절하지 않는 다정하고 너그러운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였다.

베이컨은 홀이 주는 돈에 불법 도박판에서 딴 돈을 더해 수입을 보충했다.

경우에 따라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 홈치기도 했다.

도박이나 좀도둑질은 모두 그의 전 유모인 제시 라이트풋의 도움을 받았다. 라이트풋은 베이컨과 함께 15년째 살고 있었다. 크롬웰 플레이스에서 라이트풋은 탁자 위에서 잠을 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베이컨의 대리모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크랙스턴은 크롬웰 플레이스 작업실을 "매우 기막힌" 곳으로 묘사했다. 그는 베이컨이라는 한 개인과 화가를 대표하는 것으로 세부적인 면모, 즉 호화로움과 무질서한 너저분 함의 조합을 꼽았다.

"베이컨은 바닥에 아주 넓은 터키산 카펫을 깔아 놓았는데 온통 불감 범벅이었다."

캐슬린 서덜랜드는 남편 그베이업과 함께 베이건의 작업실에서 대략 일주일 한 번 식사를 함께하곤 했는데,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샐러드 그곳에는 반감이 담겨 있을 것 같았고, 그림에는 샐러드드레싱이 붙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음식과 와인은 활용했고 대화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아파트와 가구는 물감 범벅이었고 물감 역시 생활공간과 함께 뒤섞였다. 두 가지 모두 풍경 속의 인물 안에 녹아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이 작품은 결코 인물을 보여 주지 않는다.
오직 일부분, 즉 다리 한쪽, 팔 한쪽 그리고 옷깃만이 드러날 뿐이며 다른 부분은 검은색의 팅 빈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남은 것은 내부가 팅 빈 옷의 일부분뿐이다. 이 그림은 하이 드파크에 앉아 있는 홀을 찍은 사진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장소는 아프리카의 덤불로 전혀 다르게 바뀌었고, 기관총을 닮은 물체가 인물 또는 인물이 입고 있지 않은 옷의 한쪽에 배치되었다.

베이컨은 평론가 데이비드 실베스터에게 옷의 질감이 이 그림을 이루는 한 요소라고 설명한 바 있다.
영감이 떠오른 순간 그림의 요소가 작업실 공간의 요소와 함께 결합되었다.


"사실 아주 얇은 회색층 외에는 물감을 전혀 채색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위에 바닥에 있던 먼지를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음, 플란넬 양복의 약간 폭신한 촉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뒤 '그래, 먼지를 좀 올려 보자'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먼지가 말쑥 한 회색 플란넬 양복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모두가 베이컨의 특징을 이룬다.
첫 번째 특징은 감각적인 세부에 대한 욕망이다.

회색 플란넬에 대한 묘사는 정확해 보일 뿐 아니라 마치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약간 폭신한' 표면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신경계를 작동시키는 사실주의의 추구는 베이컨이 미술가로서 갖는 근본적인 충동 중 하나였다.

이 점이 베이컨이 피카소와 다른 지점인데, 서덜랜드가 베이컨의 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두터운 붓질을 사용한 뷔야르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덧붙인 이 유이기도 했다.
곧 신경계에 보다 생생하게 또는 통렬하게 작동하는 이 미지의 추구는 베이컨의 인터뷰에서 재차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순간적인 충동에서 공전의 어떤 시도,

즉 기법적으로 말하자면 그림에 먼지를 붙이는 것과 같은 독특한 시도를 강행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베이컨은 즉흥성과 우연을 좋아했다.

여러 측면에서 베이컨의 그림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풍요로운 혼란으로부터 발생했다. 양복 표현에 사용된 먼지의 예가 보여 주듯이 그를 둘러싼 환경은 작품에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은 혼란 위에서 성장했다. 그는 그의 작품과 특별한 공생 관계를 맺었다. 주변 환경의 단편들이 그림 속에 흘러 들어간 것처럼 물감이 그에게 배어들었다.

프로이트는 "베이컨은 늘 팔뚝 위에 물감을 섞곤 했다"라고 기억한다.

("알레고리와 같은 것을 발전시킬" 때까지 물감을 섞곤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습관 때문에 베이컨은 테레빈유 중독에 걸렸고 결국 아크릴 물감으로 바꾸게 되었다.

1950년대 초 베이컨이 잠시 왕립 예술학교에서 일할 때 화장실에서 어깨에 문은 물감을 씻고 있던 그를 보았다 는 한 학생의 목격담도 전한다.
반면 베이컨의 화장품 사용은 1940년대 중반 런던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는데, 일종의 보디페인팅, 퍼포먼스아트에 가깝다.

베이컨은 턱수염을 캔버스 본래의 거친 질감이 살아 있는 뒷면에 비유했다.

(베이컨은 캔버스 뒷면에 그리기를 즐겼다)

그는 화장품을 칠 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질감이 생길 때까지 수염을 길렸고 그런 다음 다양 한 색조의 화장품을 패드에 묻혀 마치 붓질을 하듯

"덥수룩 한 수염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얼굴에 칠했다.
당시 이와 같은 물감에 대한 집착은 다른 동료와는 다른 베이컨의 특징 중 하나였다. 마음속으로 소묘 화가라 생각하거나 적어도 물감을 주의 깊고 신중 한 방식으로 채색하는 화가들의 무리 속에서 베이컨은 물감과 물감이 낼 수 있는 효과에 대한 적극적인 선호를 보여 주었다. 베이컨에게 있어 이것이 바로 물감이 가진 물성의 본질이었다.

이로 인해 예상 밖에 베이컨은 다소 인기가 시들해진 윗세대 미술가인 매슈 스미스의 지지자가 되었다.

스미스의 작품은 1945년 르페브르 전시에서 베이컨의 작품과 나란히 걸렸다. 스미스의 주제는 곡선이 두드러지는 여성 누드나 붉게 무르익은 과일 더미로, 베이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스미스가 주제를 휘몰아치는 물감의 소용돌이와 덩어리로 묘사하는 방식은 그보다 나이 어린 미술가인 베이컨이 동조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베이컨의 글 중 유일하게 출간된 것이 스미스의 작품을 칭송하는 짧은 글이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스미스는 희화, 다시 말해 개념과 기법을 밀착시키려는 시도에 관심 있는 존 컨스터 블 과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이후의 극소수의 영국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런 의미에서 회화는 이미지와 물감을 완벽하게 결합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곤 물감 이 되고 물감은 곧 이미지가 된다.
이 결합은, 즉 붓질과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은 베이컨에게 성배 같은 것이었다.
훗날 호지킨은 "물감을 가득 머금은 붓이 칠해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자수 조각이나 렘브란트 판 레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그랗게 말린 모자의 가장자리" 같은

"무언가로 되는" 방식에 대해 매우 유사한 견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호지킨은 이것을 구두로 하는 설명 또는 의 도적인 계획을 뛰어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법과 같은 변신이었다.

"늘 그것을 쫓는다면 결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베이컨은 분명 이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런 효과를 의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는 도중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물감을 운용함에 따라서 물갑이 스스로 그런 효과를 이루는 것과 흡사하다. 이런 이유로 베이컨은

"진정한 그림은 우연과의 불가사의한 끝없는 고투"

라고 생각했다.

식감을 타고난, 큰 판돈을 노리는 도박꾼인 베이컨에게 있어 행운 이든 불운 이든 운에 있어서나 전적으로 임의적인 창조적 잠재력에 있어서나 우연이 문제의 핵심이다. 베이컨은 두 개의 형용사, 곧'불가사의한'과 끝없는', 이 두 형용사가 의미하는 바를 상세하게 부연 설명했다.
[회화는] 불가사의하다.

왜냐 하면 물감이라는 물질 자체가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될 때 신경계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왜냐하면 매체가 유동적이고 섬세한 까닭에 생겨나는 모든 변화가 새로운 유익함을 만든다는 희망 속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습작과 구성 스케치를 통해 서서히 완성작으로 발전해 나가는, 세심하게 계획된 그림이라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베이컨은 즉흥적인 그림의 개념을 믿었다.

심지어 사전에 구상한 경우에도 그랬다. 실제로 어느 정도로 즉흥적이었는지에 대해서 그는 표현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고 질문을 철저하게 회피했다.

그러나 1945년 르페브르 갤러리에서 공개한 작품은 그런 이상의 실현과는 아직 다소 거리가 있었다.
(십자가 책형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에서 중앙의 눈을 가리고 있는 생물 앞에 놓인 특이한 삼각대를 이루는 붓질은 느슨하고 물 흐르듯 유연하며, 빠른 속도로 채색된 듯 보인다.

(베이컨은 일단 시작하면 빠른 속도로 고쳤다).

그러나 베이컨이 추구했던

"이미지와 물감의 완벽한 결합"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1946년 베이컨은 그의 작업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자 본인 스스로 완결되었다고 느낀 최초의 완성작을 제작했다.

프로이트는 이 작 품을 (우산이 있는 아주 훌륭한 작품)으로 기억했다.

이 특별한 작품을 묘사하는 제목을 두고 베이컨은 고심했다. 결국 그는 간단하게 (회화 1946)으로 정했다, 베이킨에 따르면 이 제목은 '우연처럼' 떠올랐다. 그는 또 다른 이미지의 결합에 착수했다, 침팬지와 맹금류의 결합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베이킨이 남긴 긴급은 상당히 같은 이미지를 암시했다,

"이것은 다른 사진 위에 올라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파 같았다."

임무에 이 설명이 전정 사실 일 수도,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베이컨이 느낀 바가 작품의 더 깊은 진실임을 강조하는 말 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 요소들은 무작위 적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볼 때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역설한 것일 수 있다.
이미지 요소들은 베이컨의 작품이나 주변 환경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주요 형상인 머리가 없으며 입을 크게 벌린, 양복 입은 남자는 앞에 마이크를 두고 연단에서 연설하는 정치인의 사진, 특허 나치 고위 당원 사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우산은 초창기 영화감독의 작업 모습을 촬영한 스냅사진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도구로, 베이컨의 다른 작품에 이미 등장한 바 있다. 아래 바닥은 크름웰 플레이스 작업실의 물감이 뿌려진 터키산 카펫과 매우 흡사하다.
그림 속에서 진열된 고기, 즉 양의 양쪽 단면처럼 보이는 전경의 고기와 그 뒤쪽의 네 다리를 벌린 채 십자가에 통째로 매달린 소의 사체를 고려할 때 배경의 핑크색과 자주색 판은 옛 정육점의 타일과 관계가 있다.

날고기는 베이컨의 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모티프였지만 심리적, 미학적 측면 모두에서 깊은 감 각에 반응하는 주제였다. 베이컨은 물감만큼이나 고기도 좋아했다. 그는 좋아하는 장소였던 해러즈 백화점의 식품 매장에 고기를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그 멋진 상점에 가면 거대한 죽음의 공간을 지나가게 되는데, 고기, 생선, 새 등 온갖 것이 죽어서 누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기의 색이 보여 주는 굉장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화가는 기억해 야 합니다."
베이컨은 고기가 대단한 장관이라고 생각한 동시에 그 광경은 그에게

"삶의 총체적인 공포, 다른 생명체를 뜯어먹고 사는 생의 공포"를 상기시켰다.

이는 특이한 취향을 보여 주는 언급이지만 미술사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16세기부터 정물화의 긴 역사는 죽은 닭과 소의 옆구리 살이 보여 주는 시각적 매력을 강조했다.

프란시스코 고야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비롯해 도살된 동물과 인간의 죽음, 심지어 성스러운 순교자들과 의 관련성을 암시하는 부수적인 전통도 존재했다.

고야의 (죽은 칠면조 1808~1812)는 살해된 순교자를 연상시키며, 렘브란트의 (도살당한 황소 1655)는 식품의 생산과 기독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주제를 연결 지었다.
물론 이것은 베이컨이 환기 한 관계였다.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이 조합, 즉 해러즈 백화점 식품 매장과 전체주의자 연설가, 우산, 베이컨의 카펫의 조합은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자체가 메시지였다. 십자가 책형이 있긴 하지만 부활과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전체주의의 폭군이 관장하는 고통과 죽은 고기가 등장한다.

이것은 화려하고 음울한 색채의 의미 없는 고통과 잔인성을

극대화하여 다룬 제단화였다.
베이컨이 이 조합을 그의 주장처럼 우연적인 발상은 아닐지라도 직감적으로 떠올린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베이컨은 작업 전체를 통틀어 작품의 의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작품을 따분하고 문학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자세하게 서술되는 순간 지루함이 시작됩니다. 이야기가 물감보다 더 소리 높여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베이컨은 오랫동안 서사성을 선호했던 영국 미술계에 반기를 들었다. 이야기는 신 낭만주의자의 다양한 성향의 작가들이 모두 공유했던 관심사였다. 라파엘 전파의 서술적이고 매우 문학적인 작품의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수세기 동안 종교 미술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나라에서 베이컨이 그린, 심지어 폭력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제단화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또 다른 일탈이었다.
몇 가지 측면에서 회화 1946은 베이컨의 야심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하나는 크기다.

이 작품은 십자가 책형 발치에 있는 형상을 위한 세 개의 습작, 보다 훨씬 크다.
높이가 약 183센티미터에 달하는데, 충격적인 이미지는 차치하 더 라도 대부분의 수집가 집에 거기에는 이젤 회화로서 상당히 크고 무겁다, 그러 나 그 크기보다 더 야심 찬 것은 예술적, 철학적 지향이었다.'
미국의 화가 바넷 뉴먼 은 미술 비평이 무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싸움 대상은 미켈란젤로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은 터무니없이 지나친 언급이었다 할 수 있다. 비평가 로버트 휴스는 그 입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쎄, 뉴먼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소!" 그러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부터 매료되었던 베이컨은 높은 목표를 정한다는 점에 있어서 뉴먼에게 동조했을지도 모르겠다. 베이컨 역시 정서적, 예술적 효과에 있어서 인간의 조건을 반영하기에 충분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관찰했듯이 무의미로 규정되었다. 신은 죽었고, 삶은 무의미하며, 그 끝은 결국 죽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옛 거장들이 갖고 있던 심오함과 힘 있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
뉴먼과 마크 로스코 같은 미국의 동시대 화가들 역시 여기에 동의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베이컨의 '인간 이미지에 대한 단호한 고수'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뉴욕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1946년에 처음으로

'추상 표현주의자'들로 불렸는데, 시각 세계에서 인식 가능한 인물이나 사물을 재현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물감을 통해서 과거의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이 갖고 있는 진지함과 영웅적인 힘에 필적하는 그림을 열망했다.
그들은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자신들의 그림이 숭고한 것 이기를 바랐다. 베이컨이라면 아마도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또는 적어도 쉽게 지목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구상 회화를 통해 비숫한 목표를 지향했다.
차이점이라면 뉴욕에는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몇몇 미술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0년대 런던에는 숭고함을 목표로 한 사람이 베이컨 외에는 없었다. 베이컨은 홀로 작업하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탁월한 재능을 가진 몇몇 동료 화가가 포함된 활기찬 미술계의 중심부에 속해 있긴 했지만 그는 줄끝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함께 작업하고 교류할 수 있는 여러 명의 예술가 중 하나일 수 있다면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함께 대화를 나뉠 대상이 있다면 아주 좋을 것 같다. 지금은 대화를 나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쩌면 내가 운이 없어서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환경 아래서 베이컨이 용기를 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는 실베스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것에 있어서 후발 주자"로 나는 일종의 늦깎이였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베이컨은 또한 독학으로 그림을 익힌 회화계의 아웃사이더였다. 이것이 마비 상태를 초래하는 자기 의심을 낳았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즉흥적인 재능의 분출을 통해 미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작업을 지속했다.

1933년 초 이십 대 중반이었을 때 그는 이미 당대의 가장 비범한 영국 회화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 (십자가 책 형 1933)은 막대기 같은 팔과 핀같이 생긴 머리를 가진 유령 또는 영혼 심령체의 기이한 형상을 묘사했다. 이 작품이 1930년경의 피카소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섬뜻 한 특징을 보여 주었다. 베이컨의 대표적인 특징인 기묘함은 이때부터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십자가 책형은 판매되었고 영국의 선도적인 모더니즘 비평 가인 허버트 리드 책에 즉각 실렸다.

그의 책 (오늘날의 미술사 Now.1933)은 베이컨의 작품을 피카소의 작품 맞은편, 두 쪽짜리 펼친 면에 실었다.

이를 통해 이 두 작가의 연관성뿐 아니라 '여기 피카소를 있는 선두주 두자가 있다'는 의미를 암시했다.
그런데 그 뒤 1년이 되지 않아 베이컨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1934년 트랜지션 갤러리에서 열린 베이컨이 자체 기획한

첫 개인전은 판매나 평가에 있어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전시는 더 타임스로부터 신랄한 비평을 받았고, 작품 몇 점이 판매되었을 뿐이다. 베이컨은 남은 작품을 모두 파기해 버렸다. 그중에는 어느 수집가가 구입하고자 했던

(십자가 책형을 위한 상처)라는 작품도 있었다.
훗날 베이컨은 이 작품을 파기한 것을 후회했다. 1936년부터 베이컨은 사실상 그림을 포기하고 1944년까지 아무 작품도 제작하지 않았다.

그가 수백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파기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전하는 작품은 아무것도 없다.

미술가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제거함으로써 작품을 편집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베이컨처럼 말소에 가깝게 작품 수를 줄이는 경향은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1930년대에 제작된 작품을 비롯해 베이컨의 초기 작품들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베이컨이 이례적으로 많은 작품을 파기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큰 야망 때 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는 수준의 작품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의심 역시 또 다른 이유였음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매우 높은 수준의 자학적인 기준을 낳았다. 그가 보기에 자신이 제작한 작품 중 또는 이 점에 있어서라면 다른 사람의 작품 역시 색 좋은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가 비교적 만족했던 극소수의 작품 중 한 점이

(회화 1946)이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언제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베이컨은 순수하게 그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것을 경멸했다. 그는 자신의 각 품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결국 그것만이 유일한 건강한 정신 상태라 할 수 있다.
1940년대 중반 무렵에 베이컨은 풍문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베이컨에 대해 오늘날의 미술에 실린 (십자가 책형) 이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영향력이 있었다. 훗날 피카소의 전기 작가가 된 리처드슨은 20대 초반이었던 당시, 현대 미술에 매료되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그 도판을 숭배"했지만 아무도 베이컨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사실상 베이컨의 작품을 알린 것은 (회화 1946)이었다.
1946년 부유한 수집가는 자신의 갤러리를 열고자 했다.

(희화 1946)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2백 파운드

(약 29만 5천 원)에 구입했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작가에게는 큰 금액이었다. 2년 뒤 그녀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 그 작품을 팔았다.

베이컨은 공공행진처럼 가격이 올라갔다.

한 번의 창조적인 그는 사명에서 단숨에 세계적인 현대 미술 컬렉션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베이컨은 1946년 말 프랑스 리비에라로 떠났다.

한 점이 남아 있긴 하지만 2년 동안 완성작을 내놓지 않았다.

베이컨은 런던 미술계에 혜성같이 등장하고는 이 내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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