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루시안 프로이트 전쟁 시기 런던의 미술

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 마틴 게이퍼드

by 조 씨

그는 매우 생기가 넘쳤다.
결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마치 요정 또는 요정이 바꿔치기한 아이처럼
또는 남자 마녀처럼.
- 젊은 프로이트에 대해: 스티븐 스펜더-

1942년, 런던의 일부가 폐허로 변했다.
그는 1940년 가을 영국 대공습 시기에 폭격 맞은 런던 중심부를 처음 맞다고 드렸던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런던은 무장 침입에서 막 벗어난 포위당한 도시였다.

미술은 다른 삶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제한되었고 크게 축소되었다.
내셔널갤러리는 한 달에 그림 한 점만 전시했다.
당시 예술인들은 파괴 속에서도 새로운 에너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런던은 유럽으로부터 고립되었고 고질적인 섬나라 근성이 악화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군대나 전쟁 포로수용소 또는 학교에 있거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서 들판에서 감자를 캐고 있던 미래의 미술가들 마음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를 묘사하던 해에 막 열아홉 번째 생일이 지난 두 명의 젊은 화가가 런던 북부 세인트존스우드 애버콘 플레이스의 한 집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19세기 초 고전 양식으로 지어진 멋진 테라스식 건물이었다. 이 3층짜리 주택에서 두 사람은 각자 개인 작업실을 마련했고 중앙에 있던 고전음악 평론가는 이 새 이웃에 점차 짜증이 났다.
세입자는 존 크랙스턴과 루시안 프로이트는

"우리는 바닥에 유리를 깔았는데, 특별한 손님이 올 경우에는 새 유리판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복층형 주택으로 손님이 들어오면, 바닥 전체에 놓인 수십 개의 유리판이 그를 맞았습니다.

그의 발아래에서 그 유리판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금이 갔죠. 아래충에 사는 사람은 그 소리에 대단히 짜증을 냈습니다."
현관 고리에 쭉 걸린 모자가 그 효과를 완성했다.

거기에는 경찰 헬멧 등 발견할 수 있는 아무 모자나 걸려 있던 반면 위층에는 프로이트가 키우는 뾰족한 가시가 있는 거대한 식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피커딜리의 유명한 박제사 롤런드 워드에게 구입한 얼룩말 머리 박제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 베를린 외곽의 외할아버지 사유지에서 승마를 배운 이후로 그가 사랑했던 말

'도시적 대용물'이었다.

박제되거나 보존 처리되지 않은 다양한 죽은 동물은 프로이트와 크랙스턴 두 사람 모두가 선호하는 주제였다.
위층에서 펴져 내려오는 부패의 악취는 때때로 아래층을 괴롭혔다.
한 번은 중요한 미술 거래상이 중산모자를 쓰고 서류 가방과 접은 우산을 든 채 도착했고 초인종을 눌렀다.

런데 벌거벗은 프로이트가 깨진 유리바닥 위를 걸어와 문을 열어 주었다.
프로이트의 유령 같은 몰골을 놀라게 한 것은 당연했다.

어릴 적부터 프로이트는 남다른 성격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1930년대 말 그의 집에 들른 열여섯 살의 프로이트를 다음 과같이 기억한다.
"프로이트는 매우 독립적이었고 모든 것에 반항했다.

그는 우리 부모님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그가 털북숭이였기 때문이다.

야성적인 외모였다.
당시 그는 매우 특이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세상에, 내 아이가 저렇게 보일까 무섭구나."라고 말했다. "
기자, 형제인 시인과 사진 편집자는 전쟁 기간에 프로이트를 만났는데, 그의 "색다르고 다소 악마 같은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중년 들은 이 젊은이를 알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초기작은 관찰을 바탕으로 하든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든 그의 작품의 뚜렷한 특성인 강렬함이 있었다. 비평가는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젊은 프로이트를 토마스 만의 소설, 니스에서의 죽음(1912)의 등장인물 타지오와 비교했다.

타지오라는 인물은 "창조력을 상징"하는 듯 보이는 "대단히 매력적인 소년"이었다.

프로이트의 진정한 경로나 그가 궁극적으로 하게 될 작업의 중요성은 1942년 당시로서는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막내아들로, 건축가였다.
프로이트 가족은 베를린에서 살았었지만 나치가 권력을 잡은 직후 독일을 떠났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열 살까지 특권총의 세련된 중부 유럽식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서 진보적인 영국의 기술학교에 다녔으나 모든 학교에서 거친 행동을 일삼아 퇴학당했다.
일상 속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매우 특별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1940년대 초 런던ㅡ그리고 영국ㅡ의 다른 곳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미술가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문 진로여서 이해가 어려웠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그 시절 화가는 진지한 직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말하면 사람들은 '당신의 취미를 묻는 게 아닌데요'라는 대답을 하곤 했죠."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의 추정에 따르면 작품 활동으로만 생계를 꾸리는 화가는 당시 영국에 여섯 명 정도뿐이었으며 어린 프로이트가 알고 있었듯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초상화가들은 부유했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뛰어난 미술가들은 영감과 새로운 방향성을 얻고자 본능적으로 프랑스에 의지했다.
1942년 1월에 타계한 월터 시커트는 20세기 전반 런던에서 활동한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진지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늘 "천재 화가는 파리를 서성이며 센 강변에서 구애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전업 화가라는 사실이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에 이상한 일로 비쳤다면, 모더니스트는 말할 것도 없이 이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942년에 제작된 영화 (지독한 수줍음)은 프로이트가 단역 배우로 출연한 두어 편의 영화 중 하나로, 프로이트는 이 영화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 역할을 맡았다.
그 사이 이 두 젊은 미술가은 런던 남부의 골드 스미스 대학교에서 그곳의 실물을 보고 그리는 라이프 드로잉 수업을 통해 기술을 연마를 한다.
프로이트는 "타고난 재능이 거의 전무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의 초기 드로잉은 생기를 띠며, 많은 미술가가 결코 성취하지 못하는. 개성적인 선을 갖고 있었다.
그는 관찰과 부단한 드로잉 작업을 통해 선을 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단계에서는 그래픽 아트가 회화에 비해 실현 가능성이 훨씬 더 커 보였다. 프로이트는 회화를 전혀 통제할 수 없다고 느꼈다.
프로이트가 참여한 수업은 (지독한 수줍음) 속 '현대 미술 학교보다는 전통적인 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작품의 독특한 시도는 일부의 비평적 관심을 끌었다.

젊은 루시안 프로이트: 전쟁 시기 런던의 미술

'우리 둘 다 아마도 파블로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는지 그저 선 하나를 끝없이 그어 내렸다. 드로잉의 일반적인 방식은 누드의 옆모습을
대략 스물다섯 개의 선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눈이 거기에서 최적의 선 하나를 선택했다.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타협이라고 생각해 앉아서 누드를 오로지 하나의 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제작했다.
점으로 음영을 표현했기 때문에 "홍역은 좀 어때?"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런던의 미술계는 작은 동네였고 1939년 이후에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몇몇 중요한 인물이 런던을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1942년 변화하는 전세를 경험했다.
런던에 남은 화가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무력 투쟁에서 거부당한. 또는 추방당한. 사람들이었다.
전쟁 말기에 젊은 크랙스턴, 프로이트와 런던에서 가장 성공한 젊은 미술가 가 되었다.
하나의 집단처럼 때로는 신낭만주의자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당시 실질적인 선언이나 움직임의 기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 사이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그림이 아닌 드로잉을 그렸다. 이들의 작품은 책이나 잡지를 위한 삽화였고 따라서 이미지는 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이들의 협력 관계는 시각적 양식만큼이나 출판과도 관련이 깊었다. 프로이트, 크랙스턴 외 그의 동인들이 만든 (호라이즌)에 충실했다.
프로이트는 "독특한 재능과 개인적인 매력을 통해" 영국 문화계의 중요한 동성애충의 주목을 끌었다. 그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통해 프로이트의 드로잉 한 점이 1940년 (호라이즌)에 실렸다. 당시 프로이트는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소년이었다.
한편 프로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미술가 사이에는 향수와 악몽이 뒤섞인 불안정한 정서가 존재했다.
프로이트의 초기 스케치북과 회화에서 환상적인 요소를 다수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화가의 방 1943~1944)에서 애버콘 플레이스의 거대한 얼룩말 머리가 작업실 창문을 통과해 안으로 고개를 쑥 내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로이트는 점차 현실, 곧 그의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고집했으며 서덜랜드가 말한 발명, 즉 주제를 지어 내는 것에 점차 반대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자신의 자서전에 시와 진
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당연히 시와 진실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프로이트는 진실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시를 발견했다. 시각적 진실과 시가 빚는 무수한 대비와 조합은 이후 몇 년간 런던의 화가들이 탐구하게 될 주제였다. 추상과 사회적 사실주의, 기하학적 질서, 풍부한 색채, 물감의 자유분방한 표현력 그리고 팝아트와 시각적 사실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발전 중 일부는 이전의 것들, 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 끝 무렵에 이르면 런던의 작은 미술계는 갑작스레 매우 커졌다.
1945년 5월 8일 유럽에 평화가 선포되자마자 유럽 대륙으로 향했다.
남서부 콘월 반도에 있는 실리 제도에 갔다.
전쟁이 끝난 상황 속에서 실리제도는 거의 외국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후 프랑스 어선을 타고 영국 해협윤 건너 파리로 가 피카소 전시를 보려 했으나 해안 경비대가 그들을 발견해 실패했다.
1946년 그들은 마침내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해 그들은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프로이트 개인의 삶과 화가의 삶 모두에 있어 파리의 피카소를 비롯한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바로 베이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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