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 미술 : 리사 필립스
퍼포먼스ㆍ보디아트ㆍ비디오
페미니스트 미술이 보여준 다양한 탐구는 여성과 남성 작가들 모두의 퍼포먼스 작업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퍼포먼스 활동 중 상당수는 여성 정체성과 한 여성이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에 대한 문제에 집중되었다.
1960년대 초 플럭서스 예술가인 캐롤리 슈니만은 어느 여신의 존재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 위로 뱀들을 기어 다니게 한 (아이 바디)도 같은 작업을 통해 페미니스트의 관심사를 예시했다.
(아이 바디)는 자연스러운 에로티시즘을 보여주었고, 캐롤리 슈니만 본인은 이를 "우리 몸을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밖의 페미니스트 플럭서스 퍼포먼스의 원형 격인 작품으로는 오노 요코의 (것 피스)와 보타 시게코의
(질 그림)을 들 수 있다.
캐롤리 슈니만
아이 바디:카메라를 위한 변형 행위 36가지
Eye Body: 36 Transformative Actions for Camera
1963
젤라틴 실버 프린트
35.6x27,9cm
작가 소장
오노 요코
컷 피스 Cut Piece 1964
퍼포먼스
뉴욕 카네기 리사이트 홀, 뉴욕
사진ㅡ니즈마 미노루
시게코
질 그림 Vagina Painting
1965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컷 피스>에서는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내 오노의 옷을 잘라내게 했는데, 이 전략은 주체와 객체, 희생자와 공격자의 관계에 의문을 갖게 만들려는 구상이었다.
구보타의 퍼포먼스 <질 그림>은 바다에 깔아 놓은 종이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 팬티에 붉은 물감을 적신붓을 묶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였다. 이는 명백히 여성의 생리, 출산, 창조에 관한 언급이자, 액션페인팅을 여성 해부학 코드 내에서 재정의한 것이다.
이들 작업은 자신의 질에서 긴 두루마리 텍스트를 끄집어내어 읽은 슈니만의 (안에 있는 두루마리)처럼 성적인 내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후 퍼포먼스의 분명한 선례가 되었다.
이 텍스트에는 슈니만의 작품을 일축해 버린 비평가 아네트 미켈슨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행위와 내용 모두에서 슈니만은 창조에 대한 은유를 환기시겼다.
백남준
TV정원 TV Garden 1974-78
컬러텔레비전 30개, 화분과 나무 100개
가변적 크기
비디오의 접근성이 광범위한 예술가들에게 어필했고, 이들은 이 테크놀로지를 다른 미술 형식들과 결합했다.
만 레이는 바이마르산 애완견 사진을 찍어 유명해진 윌리엄 웨그먼은 퍼포먼스와 비디오를 통합해서 새로운 유형의 여흥 거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1969년부터 비디오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만 레이를 출연시킨 작품은 시각적인 동음이의어적 익살과 무표정한 유머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머 양식은 미 서부 해안 팝아트나 개념 미술 작가들 사이에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여러 양식과 매체로 작업한 새로운 부류의 미술가를 상징하면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웨그먼
릴 4:깨어나기 Reel 4: Wake up
1973-74
비디오테이프, 흑백, 유성, 21분
작가 소장
조각, 사진, 퍼포먼스, 비디오아트에서 언어와 신체 참조 물들을 활용한 것과 갈수록 폭력과 부조리를 혼합한 것이 다른 미술가들에게 강한 자극이 돼있던 것이다.
대안공간. 대안 미술
비디오와 퍼포먼스 같은 새로운 미술 형식이 급속히 부상하면서 전문적인 전시 공간이 요구되었다.
뉴욕에서는 독립 비디오 제작자들의 요구에 부응해 생겨났고 미술가들의 책을 제작, 전시하기 위한 곳이었다.
이들 비영리 대안공간 대부분은 넝마 업자와 고물상이 밀집해 있던 하우스턴 가 남쪽, 오래된 공장 지대인 소호의 뉴욕 예술공동체에서 갑자기 탄생했다.
1970년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서 상업 화랑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지만, 다양한 지역 주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비영리 공간들이 문을 열었다.
1971년 소호는 미국 내 최초로 예술가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값싸고 빛이 잘 드는 공간을 찾던 미술가들은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반부터 이 일대의 로프트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로프트 운동은 소호 발전을 위해 '거주 미술가' 정책, 즉 소호에 미술가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해 준 60년대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예술가 겸 사업가들은 동료 작가들을 위해 이곳 건물들을 사들여 개발했다.
미술가들이 황폐해진 공장 건물을 개조하고
산업 슬럼가였던 지역을 되살리면서 도시의 개척자들이 되었다. 뒤를 이어 전국의 미술가들이 쇠락해 잊힌 다른 도심 지역을 고급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전국적 차원에서도 대안공간들이 생겨났다. 이들 대안공간은 상업 화랑들이 다를 수 없는 작품들을 제작하는 미술가들 수가 점점 늘고 있던 때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막 떠오르는 작가들에게 데뷔 전시를 열어주기도 하면서 상업 화랑과 미술관들을 위한 작가 양성 시스템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대안공간은 정부로부터 많은 보조를 받아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
1977년에 이르자 예술진흥기금은 1억 달러를 할 당해 대다수의 대안적인 전시 공간에 운영 자금을 지원했으며, 뉴욕 주의회의 예술지국과 다른 주의 유사한 기구들 역시 이러한 재정 보조에 합세했다. 사실 '대안공간'이라는 용어는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예술진흥기금 시각예술부장으로 있던 작가이자 평론가 브라이언 오도허티가 고안한 말이다.
1970년대에 정부의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그 결과 미술시장은 불안정했지만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보조금 덕에 작가들은 작업과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고, 대안공간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번성했던 대안 미술 형식들이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와 조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연 이들 매체는 과정 지향적 작품, 개념 미술,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 작품의 점증하는 인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몇몇 화가와 조각가에게 해답은 신예 미술이 제기하는 '비순수한' 용어들로 자신의 작품을 다시 구상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미니멀리즘까지 회화와 조각을 지배했던 형식주의 도그마를 거부하면서 주제와 심리적 내용을 받아들였다.
중견 화가들은 형식주의 회화의 억압적인 관행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1969년 필립 거스턴의 작품은 파격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택했다. 추상을 포기하면서 많은 젊은 화가들이 모델로 삼은 신비스럽고 상징적인 인물 형상을 도입한 것이다.
두텁게 칠한 캔버스는 만화 같은 개인적 상징들과 흔히 절망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들, 예를 들어 담배, 술병과 커다란 눈이 지배하는 도식화된 두상으로 채워져 있다.
필립 거스턴
음모 Cabal
1977
리넨에 유채
172.7x295cm
휘트니미술관, 뉴욕
앨리스 닐
존 페로 John Perreault
1972
리넨에 유채
96.5x162.2cm
휘트니미술관, 뉴욕
필립 펄스타인
거울과 동양 융단 위의 여성 모델
Female Model on Oriental Rug with Mirror
1968
리넨에 유채
152.6x183cm
휘트니미술관, 뉴욕
1930년대부터 작업해 온 앨리스 닐은 빈 바탕에 강한 의지의 캐릭터로 표현된 솔직하고 대결적인
초상화 작품들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두 화가는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에서 거칠고, 다소 투박하며, 표현주의적인 기법들을 구사했는데, 이때 물감 자체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두 작가 모두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포용했고, 알아볼 수 있는 소재를 회화에 다시 도입하는 길을 터주었다. 필립 펄스타인의 구상 회화에서는 한두 명의 누드모델이 집안 실내 공간에서 잘린 시각 안에 배치되고 있다. 차가운 피부 색조, 대 젯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포즈, 과장된 원근투시법이 한데 어우러져 하드에지 수법을 구사했으면서도 불안정한 표현주의적 특성을 부여한다. 50년대부터 작업해 온 사이 트웜블리의 과정 지향적인 추상 회화는 타이틀, 팔레트, 낙서 같은 형상들로 신화적 내용과 문학적인 함의를 담았을 뿐 아니라, 감각적인 물감 처리와 어떤 양식이나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성으로 인해 젊은 작가들의 숭배를 받았다
사이 트월블리
무제 Untitled
1968
캔버스에 유채와 크레용
200.7x262.6cm
휘트니미술관, 뉴욕
조너선 보로프스키 같은 많은 젊은 미술가들 또한 회화의 생명력을 거듭 주장했다. 제니는 의도적으로 '나백' 회화 기법들, 즉 빠른 붓놀림과 만화 같은 인물들을 풍자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직설적으로 담은 작품들에 사용했다.
그 뒤로 그는 이전과는 극적으로 전환되고, 고도로 정련된 극사실적 기법을 적용, 테크놀로지가 파괴한 환경에 대한 우울한 시각을 표현했다. 보로프스키는 자신의 꿈을 드로잉, 회화, 조각의 주제로 삼았고, 이들 은주로 강력하고 조밀하게 채운 설치 작품에서 한데 결합되었다.
회화가 재인식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각 역시 더욱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파편화와 자기 성찰의 시기였던 1970년대 예술계는 기분을 들뜨게 하며 풍요롭고, 자유방임적인 성장을 이뤘다. 간결하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경
차들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형식과 개넘들이 시대를 풍미했다. 다원주의는 이러한 이질적인 경향들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유행어였고, 이는 많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러한 가능성 중에는 하나의 우세한 양식, 혹은 단일한 양식에 집착하는 미술가의 개념이 과거의 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