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메헤렌(네덜란드어. Han vanMeegeren)
본명: 헨리퀴스 안토니위스
1889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30일)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위조범
판 메이헤런(Henricus Antonius van Meegeren)이다.
그의 일생은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였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끝무렵에,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암염갱(도시)에 나치 고위관계자가 점령지에서 약탈한 예술 작품을 숨겨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 중에는 헤르만 괴링의 수집품이 있었는데, 예술 전문가들도 처음 보는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있었다.
조사 결과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에서 나이트클럽을 경영하는 한 판 메이헤런이라는 네덜란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1945년 5월 나치에 협력한 죄로 체포되었다.
이것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네덜란드의 국보급 미술품을 나치에 팔아넘긴 혐의로 반역죄로 기소된다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며칠 동안의 강도 높은 심문이 있은 후, 그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실토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사실 자신이 가짜로 만든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판 메이 헤련 이 위작을 만들게 된 동기도 흥미로운데, 그는 돈 때문에 가짜를 만든 것이 아니었고, 적어도 처음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데번터르에서 태어난 판 메이헤런은 처음에는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곧 미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고전 화가들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는 그가 화가가 되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였으나, 판 메이헤련 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고전 화가들의 방식으로 그린 그림들은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판 메이헤런은 예술 비평가들을 몹시 경멸하게 되었으며 그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위작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비평가들이 위작인지도 모르고 아름다운 그
림이라고 찬사를 늘어놓으면, 나중에 그것이 위작이었음을 밝혀서 비평가들이 사실은 예술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여 망신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특히, 그가 삼은 목표는 페르메이르 전문가였던 아브라함 브레디위스 박사였는데, 그는 판 메이헤런이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꼼꼼하게 그의 계획을 진행시켰다. 페르메이르의 스타일과 기술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뿐 아니라, 그림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도록 해야 했다. 판 메이헤런은 17세기에 만들어진 캔버스를 구해서, 고전 화가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스케치를 하고 페르메이르가 사용했다는 붓과 같은 것을 사용하여 색을 칠했다.
페놀과 포름알데히드를 이용하여 300년이 지난 것처럼 보이도록 그림의 색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다음에는 불에 구워서 바싹 말리고 북을 그 위에다 대고 굴려서 그림에 균열이 약간 생기게 한 다음에, 갈라진 틈에다가는 검은 잉크를 채워 넣었다.
판 메이헤런이 이런 방식을 완전히 익히는 데는 4년이 걸렸으며, 그는 자신이 만든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The Supperat Emmaus)> 이 꽤 잘 만들어진 위작이며, 그 자체로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판 메이헤런은 이 그림을 브레디위스 박사에게 보였으며, 예상대로 그는 이 작품이 페르메이르의 진품이라고 감정했다. 네덜란드 예술 협회도 마찬가지로 속아 넘어갔으며, 오늘날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사들였다. 판 메이헤런의 원래 목적은 예술 비평가들을 골탕 먹이는 것이었지만, 짭짤한 수익을 거두게 되자 벌이로 위작을 만들게 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여섯 개의 페르메이르 위작을 더 만들었으며, 프란스 할스와 피터르 더 호흐의 위작도 만들었다.
특히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 나치 점령으로 인해서 사회가 어수선했기 때문에,
아무도 판 메이헤런이 만들어내는 많은 가짜 그림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치 점령기에도 미술품거래는 이루어졌다.
1942년에 그린 판 메이 헤련의 위작은 160만 휠던에 팔렸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 가격이었다.
판 메이헤런이 그린 가짜 페르메이르 그림은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Christ with the Adultress))> 였는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헤르만 괴링의 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 그림이 훗날 연합군에 의해 발견되고, 이 그림 때문에 판 메이 헤런이 체포된 것이다.
한편, 괴링이 지불한 금액은 모두 위조지폐였다고 한다.
판 메이헤런이 그 그림은 진짜 페르메이르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가짜라고 하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판 메이헤런이 직접 위작을 만들어 보여야 그의 주장을 믿을 수 있다고 했고, 판 메이헤련은 이에 선뜻 응했다. 판 메이헤런은 3개월간 가택 연금을 당했으며 그 기간 동안 경찰의 감시 하에 직접
신전에서 설교하는 젊은 예수
(Young Jesus preaching in the Temple)>
이라는 마지막 위작을 만들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 매체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판 메이헤런은 네덜란드의 수상에 이어서 두 번째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재판은 1947년 8월 29일에 열렸다.
당시 판 메이헤런은 58세였으며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으며, 자신이 위조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술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을 우려하여 그가 위작으로 만든 그림을 심사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위작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꾸려졌다.
조사 결과, 페르메이르가 살던 17세기 에는 쓰이지 않았던 코발트블루가 위작에서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판 메이헤런의 그림은 모두 위작임이 증명되었다. 판 메이 헤런은 나치에게 국보급 미술품을 팔아넘긴 매국노가 아니라, 나치까지 속여 넘긴 사기꾼이 된 셈이었다. 그는 미술품 위조 혐의로 2년형 선고받았으나, 건강상태가 안 좋아서 감옥 대신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1947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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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르메이르 Vermeer
얀 베르메르 Jan Vermeer (네덜란드어:Johannes)
1632년 10월 31일 ~ 1675년 12월 30일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출신 화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성기 시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활동했던 화가, 델프트에서 살면서 작품활동
델프트의 페르메이르
(Vermeer van Delft 페르메이르 판 델프트)
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 동명영화 소재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옛 경매 기록상으로는 다른 것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37점으로 이루어진 전체 작품의 규모는 아주 작은 편이다. 페르메이르의 첫 번째 작품들은 역사화였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는 장르화로 알려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델프트 시의 전경>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다.
알려진 그림의 숫자가 적었던 관계로 19세기에 다른 미술가의 작품을 잘못해서 그의 작품이라고 결정하는 일들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작품 규모는 연구자들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632년 10월 31일 델프트의 니오베 케르크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두 번째 아이였고 독자였다.
그의 아버지 라이니에 얀츠(Reynier Jansz)는 원래 안트베르펜 출신이었고, 1611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그곳에서 견직공으로 일했다.
1615년 그의 아버지는 디그나 발텐스와 결혼을 하고, 보스라는 이름으로 델프트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관을 운영했다.
부업으로 그는 계속 직물공으로 일을 했으며, 수공업자로 델프트에 있는 성 루가 길드에 공식적으로 가입했다. 그곳에서 얀츠는 피터르스텐비크(Pieter Steenwyck), 발타사르 판 데르 아스트(Balthasar van der Ast )와 피터르 그뤼네베 겐 (Pieter Groenewegen)과 같은 화가들과 만났다.
페르메이르가 받은 미술 교육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1653년 12월 29일 예외적인 경우지만 조합에 귀|속되지 않은 마이스터로 성 루가 길드의 조합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가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길드에서 인정한 화가에서 6년에 걸친 교육기간을 미리 거쳐야만 했다. 페르메이르가 레오나에르트 브라머의 제자였을 수도 있다고 추측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가정은 두 사람의 양식에서 보이는 커다란 차이 때문에 거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페르메이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원본 서류에 의해서 입증이 되었다.
제라르드 테르보르흐(Gerard Terborch)와의 접촉도 입증되었다
그 밖에도 페르메이르가 램브란트에게서 교육을 받은 카렐 파브리티위스(Carel Fabritius)의 제자였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다. 이런 가정은 19세기에 윌리엄 토레 뷔르거가 제기한 이후로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에 의해서 의심을 받았다. 대신 1652년서부터 1661년까지 델프트에서 살았던 피터르 데 호흐(Pieter de Hooch)의 양식이 페르메이르의 장르화에서 확실하고 세련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얀 페르메이르에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53년 델프트의 화가조합인 신트 뤼카스
(성 루가) 길드에 등록되었고 같은 해에 카타리나 볼너스와 결혼하였다.
결혼하기 전 페르메이르는 개신교 신도였으나, 결혼하면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회를 옮겼다. 이는 볼너스의 집안이 로마 가톨릭 집안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두 부부는 무려 11명의 아이를 낳았다.
1662년 ~ 1663년과 1669년 ~ 1670년, 두 번에 걸쳐 길드 간부를 지냈다. 이 날짜들만이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이야기다. 나머지는 갖가지 의문, 불확실, 그리고 추측들로 뒤덮여 있다. 평가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겨우 진가를 인정받았다. 이름조차도 2가지 다른 설이 있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직업을 계승한 화가 카렐 파브리티위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제 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37점이다. 남은 작품만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1년에 고작 두어 점 정도 그림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전해지지 않은 작품들이
더 있을 수는 있다.
이것은 페르메이르가 예술 시장을 위해서 작업했다기보다는 예술 후원자들을 위해 작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특히 11명의 아이를 가진 대가족의 가장이 1년에 그림 2점을 그려서는 부양의 의무를 지킬 수 없으므로, 그는 그림 이외의 다른 밥벌이 수단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1653년 결혼 후에 그가 화가 조합이던 신트 루카스 길드에 등록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에는 화가를 포함한 예술가. 상인. 수공인 등은 길드에 등록해야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화가뿐만이 아니라 화상으로서 그리고 예술 전문가로서의 이름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기 위해, 생활의 연명을 위해 그랬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일생 에는 시련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현존 작품 40점은 거의 대부분 소품들로서 한 두 사람의 가정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처럼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것도 있고,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다.
(풍경화 중에 델프트 풍경 :헤이그 국립 미술관 소장)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옛날 카탈로그에서 언급된 몇몇 작품들은 영원히 소실되어 버린 것 같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메이헤련 사건의 여파로 페르메이르의 새로운 작품이 발견되어도 전문가들은 별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한편 (델프트의 조망) (또는 '델프트 풍경')은 당시 네덜란드의 부국과 원양어업의 전성기를 반영하는 듯 회화적 기법의 극치와 평화로움의 절정을 잘 균형 잡고 있다.
그의 그림은 색조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 청. 황 등의 정묘 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그 밖에
(편지를 읽는 여성:드레스덴 미술관 소장)
(우유를 따르는 하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터번을 쓴 소녀:헤이그 국립미술관 소장)
(레이스를 뜨는 소녀 :루브르 미술관 소장)
(화가의 아틀리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