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야생의 응급의학과 의사(이)가 나타났다.
최소한의 도구로도 진료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고, 도구가 있으면 당연히 써야 한다. 진맥 짚어서 진단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진단을 의심하고 있다면 그에 맞는 진단 도구를 당연히 써야 한다. 이를테면 충수돌기염을 진단하는 것은 CT이고, 뇌경색을 진단하는 것은 MRI이듯, 당연히 우리는 진단 도구를 적절하게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내 몸에 청진기 하나, 펜라이트 하나만으로 뛰어들었을 때 최대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의사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재난 출동을 했던 날이었다. 어느덧 1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의사 생활동안 딱 한 번 있었다.
자주 나가보신 분들께는 정말로 코웃음 쳐질 하찮은 경험이겠지만, 그래도 나도 겪어본 것이 있으니 이야기를 풀어보아야지.
재난의료지원팀(DMAT : Disaster Medical Assistance Team)은 재난시 의료지원을 위하여 조직된 팀으로, 큰 병원마다 재난당직이 따로 정해져 있고, 재난 상황에서 중앙응급의료센터 및 상황실을 통해서 출동 요청을 받고 하게 되는데 내가 나갔던 날은 바로 대통령 탄핵일이었다. 전공의 4년 차 때, 응급병동 회진 및 병동관리업무 중이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출동해야 하니 내려오라는데, 탄핵 반대시위가 안국역에서 일어나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냥 아직은 쌀쌀했던 3월에 얇은 티셔츠에 가운과 청진기를 멘 채로 후다닥 내려가서 구급차에 태워졌다. 나 납치된 건가.
안국역에 가서, 현장에서 경증 외상환자 처치를 하거나, 환자들 중증도 분류를 해서 병원으로 보낼 것을 판단하라고 하셨다. 내가 가진 무기는 청진기와 펜라이트 정도. 혈압이나 산소포화도 측정이나 1 리드 심전도는 가능했고, 처치는 소독이나 부목, 정맥주사 정도만 가능한 수준. 안국역은 교통 통제 중이었고 대통령 탄핵 반대를 하는 시위대 중 주취자도 여럿 보였다. "어른들이 되찾은 나라! 너네 손으로 감히 임금님을 끌어내려?"라는 말씀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못 들은 척 한껏 흐린 귀를 한 채 할 일을 찾았다. 대개는 가벼운 타박상이나 긁힌 정도였지만, 주취 상태로 머리를 부딪히고 의식을 잃은 뒤 경련하는 환자가 들것에 실려서 나왔을 때 마음이 쫄깃해졌다. 내가 가진 무기는 고작 나 자신과 청진기와 펜라이트뿐. 동공 반사가 떨어지고 두피에 열상과 혈종이 동반된 상태, 의식은 통증자극에만 반응하는 정도. 뇌출혈이 강력히 의심되는 상태, 그리고 다른 부분의 외상이 없는지도 검사를 해야 할 상태. 어느 병원으로 이송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거리와 가능한 처치가 어느 정도인지까지를 보고 판단해야 했다. 처음 구급대원님이 말한 병원이 신경외과 백업이 잘 되지 않아, 신경외과 진료가 되는 곳으로 이송하도록 결정했다.
와, CT 빨리 찍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 되는구나.
이때 많이 느꼈다. 내가 환자를 열심히 잘 본다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이 검사에 의존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물론 요즘처럼 혈액검사나 영상검사가 발달하고 접근성이 좋은 지금, 있는 자원을 적절히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 베이스는 문진과 진찰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진단이 감별되고, 그것을 감별하는 수단으로 검사를 하는 것이지 무조건 검사를 다 내놓고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주객전도된 일이다. 비유하자면 그냥 오만 곳에 그물을 다 던져놓고 뭐 하나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거지. 더 꼼꼼하게 문진하고 만져보고, 내가 야생의 상태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보다 맨몸으로 할 줄 아는 게 많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통감하고, 더 열심히 만져보고 관찰하자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소아 진료가 그와 결이 많이 맞닿아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소아에서도 검사가 필요하면 할 수 있지만, 성인들에 비해서 검사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진정(sedation)'이라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다. 어른들이야 CT정도는 쉽게 쉽게 찍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통 안에 얌전히 눕는 것조차도 무서워한다. 엑스레이 하나 찍을 때도 울며 불며 난리를 쳐서 제대로 찍힌 엑스레이 확보가 의외로 그리 쉽지 않다. MRI는 검사 자체도 오래 걸려서 한 번 검사할 때는 큰 결심과 확고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어른들도 꼭 관 속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무서워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오죽하랴. 약물로 진정시킬 때 정맥주사를 쓰기에 혈관확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소아의 혈관 확보는 제법 어렵다. 실제로 내가 일하던 곳에서 1번 만에 정맥혈관 확보가 85% 정도였는데 해외 학회에서 청중들이 정말 그렇게 성공률이 높냐면서 감탄할 정도였으니까(대개 70% 안팎이다)
약물로 진정시킨 다음에는 환아의 호흡이 지나치게 억제되어서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거나 맥박이나 혈압이 떨어지지는 않는지도 모니터를 꼼꼼히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흔히 쓰는 진정 약물 중에서 케타민(ketamin)이라는 약제가 있는데, 예측 불가능한 부작용 중에서 갑작스러운 기관지 경련이 있는데 이 경우는 드물지만 치명적이다. 프로포폴도 혈압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진정의 깊이가 생각보다 얕아서 아이가 검사 중간에 깨서 협조가 안 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도 한다. 신생아의 경우에는 쓸 수 있는 진정 약물도 많지 않아 더 까다롭다. 그렇기에 검사 자체를 결정하기까지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고민을 하는 근거가 되는 것들이 바로 꼼꼼한 검진과 문진이라는 것. 이를테면 두통으로 응급실을 찾은 어린이들에게 모두 영상검사를 해 주면 나도 편하고, 보호자들도 뭐라도 했다는 마음에 마음이 좀 편해지실 수 있겠지만 그것이 환아를 위한 길은 아니다. 어쩌면 병원 갔는데 검사도 안 해 주고 약이나 먹으라고 돌려보내더라고 원망하실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약제 처방 후에 두통일기 써서 외래로 오라고 한 아이들이 영상검사를 하는 비율이 그리 높지는 않다. 대개 그냥 좋아지거나, 지나가는 일들이 대부분이기에. 어린이의 두통은 크게 '갑작스럽고 심한 두통'과 '서서히 점점 나빠져가는 두통' 두 가지로 나뉜다. 두통으로 오는 아이들은 처음 병원에 들어서며 걸어오는 순간부터가 내 진료의 첫 시작이다. 적어도 걸음걸이가 비틀대지 않고 씩씩하게 들어오는 아이들은 그래도 걱정을 좀 덜한다. 하지만 걷는 것도 힘들고, 구역 구토를 지속하며 자다가 깰 정도로 아파하는 친구들은 보호자들에게 검사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인의 진료에는 검사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소아의 진료에는 그보다는 더 고전적인 영역, 문진과 검진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나는 좋다.
여담인데,
재난 출동했던 날 가장 힘들었던 경험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반나절쯤 지나니 전공의는 먼저 들어가라고 하셔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어... 갈 때는 병원 구급차에 다 같이 탔는데, 올 때는 안국역에서 나 혼자 알아서 가라고 하셨다. 택시는 교통통제로 불가능했고 버스도 마찬가지, 지하철을 타야 했는데 흰 가운에 청진기를 멘 차림으로 타자니 매우 매우 부끄러웠다. 얇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라 너무 추웠다. 추위를 타는 계절감 없는 일반인이 될 것이냐, 병원 밖에 의사 가운 입고 나온 미친 사람이 될 것이냐, 둘 중 나는 미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누가 대통령 탄핵되어서 기쁜 나머지 혹은 미쳐버린 사람이 가운 입고 코스프레 한다고 찍어서 올릴까 봐 명찰을 주머니에 넣고 필사적으로 이름을 가리고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의국에서 끓여 먹은 컵라면이 참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