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다. 1926년에 개봉했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는데 원래는 경기 지역 민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리랑은 이거 말고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처럼 유명한 민요들만 있는 게 아니다. 무명의 아리랑이 훨씬 더 많다.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해도 60여 종, 3600여 수에 이른다.
아리랑의 본질은 즉흥곡이다. 특유의 후렴이 흥을 북돋우고 한을 다독이며 멍석을 깔아준다. 그 위에서 저마다 사연과 감정을 털어놓는다. 삶의 애환, 지역색, 시대정신이 사설로 흘러나와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다 보면 이야기나 응어리가 술술 풀리는 것이다. 그것이 씨줄 날줄로 엮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아리랑은 본래 강원 지역의 향토민요였다는 게 통설이다. 산골짜기 백성들이 나무하거나 밭일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였는데 지역민들은 ‘아라리’라고 불렀다. 이 산골짜기 민요가 전국으로 퍼져나간 계기는 19세기 후반의 경복궁 중건 사업이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이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야심만만한 대역사에 착수했다.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을 웅장하게 재건하기로 한 것이다. 공사는 18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 팔도에서 4만여 명의 인부를 징발하여 경복궁을 다시 짓는 대역사에 투입했다.
인부들에게는 고생스러운 노역이었다. 화재를 비롯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병인양요 등 국내외 사정으로 공사가 지체되기도 하였다. 노역에 지친 일꾼들은 하루빨리 고향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흥선대원군은 불만을 무마하고 사기를 올리려고 묘안을 강구했다. 전국의 놀이패와 농악대,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두둑한 상금을 걸고 경창(競唱), 곧 인부들의 노래자랑을 열기도 했다. 팔도에서 모였으니 ‘전국노래자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대원군배 경창대회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노래가 바로 강원도 일꾼들의 아라리였다고 한다. 4만여 명의 인부와 예인들은 이 산골짜기 민요에 매력을 느끼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아라리를 전파했다. 아라리에 지역의 특색있는 소리와 이야기가 배어들어 오만 가지 아리랑이 탄생했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 독립운동가였던 헐버트는 1896년에 문경새재아리랑을 채록해 서양식 악보와 함께 자신이 간행하는 잡지에 실었다.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요 / 아라렁 배 띄여라 노다 가세 /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는 임진왜란에 이어 구한말에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곳이다. 이 아리랑의 사설은 하찮은 방망이로 쓰려고 아까운 박달나무를 벤다는 비유로 건장한 청년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헐버트는 여기에 흥미로운 설명을 달았다. “아리랑은 즉흥곡의 명수인 조선인들이 쌀처럼 귀하게 여기는 노래”라는 것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아리랑이 쏟아져 나왔다, 즉흥곡이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나라를 잃으면 사람들이 떠난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해,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간도로, 연해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 땅을 헤맸다. 그들이 가슴에 품은 것은 여권이 아니라 아리랑이었다. 아리랑이 곧 조국이고 고향이었다.
‘아리랑고개’는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다. 떠나는 자는 고갯마루에 서서 고향 산천을 돌아보고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이제 고달프고 모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희망을 찾으려면 또다시 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다. 꼬불꼬불 열두 굽이 고개를 넘으면 찾아낼 수 있을까?
독립투사 김산은 확신했다. 그의 짧은 생애가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의 저서 <아리랑의 노래>에 담겨 있다. 1931년 김산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그는 감방 벽에 “이곳에서 다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고 썼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그를 지탱한 버팀목은 아리랑이었다. 아리랑 열두 고개를 넘어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열세 고개, 열네 고개를 넘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광복군도 다르지 않았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조직한 광복군은 ‘광복군 아리랑’을 힘차게 부르며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광복군 아리랑’은 가족을 떠나 광복군이 된 전사의 소망을 밀양아리랑의 경쾌한 곡조에 실은 노래다. 1942년 임시의정원에서 광복군의 공식 군가 중 하나로 제정했다.
“(1절)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 / (2절)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 불어요 / 삼천만 가슴에 광풍이 불어요 / (3절)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 배는 /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 배래요 / (4절) 동실령 고개서 북소리 둥둥 나더니 /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려요 / (후렴)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 광복군 아리랑 불러 보세”
아리랑은 고난을 넘어 희망을 찾아 나서는 한국인의 든든한 길동무였다. 삶의 애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시대정신을 나누며 우리는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를 함께 넘었다. 아리랑은 그렇게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