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 킹’의 탄생! 단군왕검은 당굴 임금이다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49회)

by 권경률

환웅은 왜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였을까?①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 단군 할아버지가 터잡으시고 /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동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첫 소절이다. 동요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부르는 인기곡이다. 우리 역사를 빛낸 사람들을 신나게 노래하다 보면 ‘국뽕’이 차오른다. 한국인의 긍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가 바로 ‘단군 할아버지’다.


단군은 신화로 전해지는 고조선의 건국시조다.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이므로, 단군은 한국인의 국조로 받들어진다. 그래서 단군 할아버지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단군의 후손이다. 그를 빼놓고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시공을 초월해 지금도 한국인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존재다.


우리 역사도 단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먼 옛날 만주와 한반도에 흩어져 살던 한국인의 조상들은, 단군의 이름으로 동족 의식을 품고 하나의 민족을 형성했다. 물론 그것은 고대의 신화일 뿐이고 실제 역사는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신화는 큰 틀에서 볼 때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문화적 그릇이다. 상고의 역사는 신화에 담겨 노래나 구전으로 전승된다. 고대사의 첫 장은 신화의 해석으로 열어야 한다.


1.jpg 2021년 개천절 당일 인천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제4353주년 개천대제 봉행 모습. / 사진 : 강화군


환웅, 하늘과 인간 세상을 잇다


한민족의 첫 건국시조 신화인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필두로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고려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한 기사가 가장 오래되고 원형에도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기(古記)>를 인용한 이 신화는 크게 세 꼭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이야기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인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환인은 제석환인(帝釋桓因)의 약자로 불교에서 도리천을 주재하는 임금을 가리킨다. 원형은 인도 베다신화의 최고신 인드라(Indra)이며 천신이자 광명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승려였기 때문에 단군신화의 신적 존재를 불교식 용어로 윤색했다. 환인(桓因)은 ‘한님’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한님은 곧 하느님을 뜻한다. 환인은 또 ‘환하다’와도 통한다. 광명을 주재하는 태양신이다.


환웅은 하늘나라의 최고신, 환인의 아들이다. 그런 고귀한 존재가 하늘 아래 인간 세상에 뜻을 두었다. 그가 서자라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버지는 이를 승낙하고 아들이 내려가 뜻을 펼칠 곳을 알아본다. 환인은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다고 했다. 환웅의 뜻이 ‘홍익인간(弘益人間)’임을 알 수 있다. 삼위태백은 뒤에 나오는 태백산을 가리키는데 일연은 그곳이 묘향산이라고 봤다.


환인은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천부인은 신의 위력과 영험한 힘의 표상이다. 부인(符印)은 조정과 관리가 나눠서 신표로 삼는 물건인데, 여기서는 하늘나라의 부인이므로 천부인이라고 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정당한 통치권을 위임받은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늘과 인간 세상을 잇는 신시(神市)를 연 것이다.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불렀다.


신단수는 고대 샤머니즘에서 신성시한 세계목을 의미한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솟아 있다. 세계목은 우주의 중심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신이 강림하고, 땅에서 하늘로 인간이 승천하는 통로다.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하는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상징이다. 신목 아래에서 샤먼은 차원을 넘나들며 하늘의 신령한 뜻을 실현한다. 환웅천왕도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뜻을 펼쳤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각각 바람, 비, 구름을 다루는 환웅의 가신들이다. 농사 짓는 데 필수적인 기상현상을 맡은 것이다. 당시의 주된 생업이 농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환웅천왕은 곡식, 목숨, 질병,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리고 교화했다고 한다. 아득히 먼 옛날, 단군이 출현하기 전의 일이었다.


5.jpg 조선중앙TV가 보도한 '북한 6대 명산’ 묘향산의 모습.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이 묘향산이라고 했다. / 사진 : 연합뉴스


신시 집단과 곰족의 ‘혼인동맹’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금기를 지켰다. 삼칠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삼가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았으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신화의 두 번째 꼭지는 단군이 탄생하여 고조선을 세우는 이야기다. 옛날에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범이 같은 굴에 살았다. 고대에는 종족을 가리킬 때 동물을 상징으로 썼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헌원이 곰, 호랑이 등 맹수들을 훈련하여 판천 들판에서 염제와 세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는 구절이 있다. 이 맹수들은 헌원의 편에 선 종족들이다. 단군신화의 곰과 범도 환웅의 신시 집단과 관계하려는 종족을 은유하고 있다.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까? 곰과 범이 굴에 살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굴속은 어둡다. 생명의 근원인 빛이 간절하다. 사람이 되고자 함은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 세계로 나가려는 것이다. 종족 차원에서 보면 원래의 신앙을 내려놓고 광명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고대에 신앙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복속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곰과 호랑이를 신성하게 여겨온 종족들이 하늘을 받들고 태양을 숭배하는 신시 집단에게 복속하여 합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단이나 종족이 통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 일 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인류학적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입문 의례에 해당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들어갈 때 시험을 거치는 것이다. 고대의 입문 의례는 격리와 정화, 그리고 재탄생의 과정을 밟았다. 곰과 호랑이가 백 일 간 햇빛을 보지 않고 굴속에 있는 것은 격리를 뜻한다. 쑥과 마늘은 삼키기 힘든 맛이지만 나쁜 기운을 씻어주는 정화 식품이다.


이윽고 결과가 나왔다. 곰은 인내하고 절제하여 삼칠일(三七日) 만에 여자의 몸으로 재탄생했다. 반면 호랑이는 금기를 어겨 사람의 형상을 얻지 못한다. 해석해 보면 곰족은 입문 의례를 통과하여 신시 집단과 합치게 되었지만, 범족은 실패하고 축출된 것이다. 여자로 거듭난 웅녀는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고,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한다. 신시 집단과 곰족의 ‘혼인동맹’이다.


고대 신화에는 역사적 사실의 파편이 박혀있다. 단군신화에는 먼 옛날 아사달에 새롭게 등장한 천신 숭배 집단이 토착 세력인 곰 토템 종족을 통합하여 더 큰 정치적 공동체로 재탄생한 기억이 들어있다. 환웅과 웅녀의 아들인 단군왕검은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시작, 고조선이 한민족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3.jpg 러시아 사할린에 사는 니브흐족에게 곰은 조상과 신의 현신이라고 한다. / 사진 :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단기 원년이 기원전 2333년인 까닭


조선은 ‘첫’과 ‘샌’을 합한 우리 옛말로 아침이 첫 번째로 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동방에 자리하여 해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후 한문이 들어오자 ‘아침 조(朝)’와 ‘밝을 선(鮮)’, 두 자를 빌어다 우리말 이름을 기록하게 되었다. 소리가 비슷하고 뜻이 통하는 한자를 골라 음차한 것이다.


고조선(古朝鮮)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처음 나온 국호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아우른 명칭이다. 위만조선은 고조선과 별도로 다루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단군조선(전조선), 기자조선(후조선), 위만조선을 합쳐서 삼조선(三朝鮮)이라고 지칭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의 세 번째 꼭지는 삼조선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단군왕검이)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백악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훗날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살면서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사람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1908세까지 살 수 있을까? 단군왕검은 아득히 먼 옛날 천신 숭배 외래 집단과 곰 토템 토착 종족을 통합한 동방의 큰 임금이었을 것이다. 사후에 단군은 시조신으로 추앙받고 그의 이름은 고조선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총칭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단군왕검의 치세가 끝없이 이어진 이유다.


단군(檀君)은 무당을 가리키는 우리말 ‘당굴’에서 나왔다. 하늘을 뜻하는 몽골어 ‘텡그리(tengri)’와도 서로 통한다. 신단수(神檀樹) 앞에서 제사 지내며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제사장이다. 왕검(王儉)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임금’의 한자 표기다. 고조선의 도읍으로 거론되는 왕검성(王儉城)은 곧 임금이 머무는 성을 말한다.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임금을 겸한 제정일치 통치자로 고조선의 신정 체제를 이끌었다.


그럼 단군은 언제 나라를 세웠을까? 우리나라 옛 문헌들은 고조선 건국 시기를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인 요(堯)임금과 연결한다. <제왕운기>, <고려사>, <용비어천가> 등 고려 후기~조선 초기의 문헌들은 요임금이 당(唐)나라를 세운 무진년에 동방에서는 단군이 개국했다고 썼다. 이른바 동시 건국설이다.


그런데 조선 성종 대에 새로운 설이 떠올랐다. 서거정 등이 왕명으로 1485년에 편찬한 역사서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당요(唐堯) 개국 원년은 갑진년이고, 단군은 요임금 25년인 무진년에 나라를 일으켰다는 기사가 정설로 실린 것이다. 중국 송나라의 현자 소강절의 당요 개국 갑진년 설을 성리학을 숭상하는 조선 선비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동국통감>에서 단군이 즉위한 해로 본 요임금 25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기원전 2333년에 해당한다. 단군기원, 단기(檀紀)의 원년이다.


4.jpg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에 전시된 비파형 동검.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을 상징하는 청동기 유물이다. /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단군조선에서 예맥조선으로


단군조선은 문헌상으로 천년 넘게 이어졌다. 이 시대를 전조선(前朝鮮)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대 동아시아에 거대한 문화 변동이 일어난 것은 기원전 12세기의 일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은(殷)에서 주(周)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졌고, 만주와 한반도에는 청동기문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그 여파로 종족 이동과 교체, 그리고 통합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단군조선도 시대의 격랑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청동기문화의 물결을 타고 농경 생활을 하는 알타이 계통의 종족이 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났다. 민무늬토기가 퍼져나가고 비파형 동검이 등장했다. 지석묘와 석관묘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중국에서는 이 동방인들을 ‘예맥(濊貊)’이라고 불렀다. 예맥족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먼저 요하 유역에서 일어난 세력이 단군조선을 대체했고 다른 집단들도 훗날 부여·고구려 등의 모태가 되었다.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들이다.


기원전 12세기는 기자조선이 세워졌다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말기의 충신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했다고 한다. 이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봉했다는 것이다. 후대 중국 문헌인 <상서대전> 은전, <사기> 송미자세가, <한서> 지리지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기자조선이 들어선 곳은 난하 하류의 산해관 지역이라고 하는데 뚜렷한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


기자조선은 중화사상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조선의 제후로 봉한다고 실제 다스리는 건 아니다. 기원전 12세기에 단군조선을 대체하고부터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 세력에게 넘어가기까지 존속한 것은 기자조선이 아니라 예맥조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는 후조선(後朝鮮)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들의 세력권은 요동반도에서 서쪽으로는 요서의 대릉하 유역, 동쪽으로는 한반도 서북 지역까지 미쳤다. 고고학 발굴 자료로 보면 비파형 동검 문화의 분포 범위다. 그렇다면 도읍은 어디였을까?


2.jpg 지난해 10월 3일 평양 단군릉 앞에서 열린 북한의 개천절 행사. / 사진 :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고조선 왕검성은 어디 있었을까?


“대동강물이 연기 자욱한 황무지를 적시니(大同江水浸烟蕪) / 왕검성의 봄이 그림 같구나(王儉春城似畵圖) / 만리길 도산에 가서 옥홀을 잡고 오니(萬里塗山來執玉) / 예쁜 아이가 오히려 해부루를 기억하네(佳兒尙憶解扶婁)”(유득공, <이십일도회고시> ‘단군조선’)


1778년 백탑파 문인 유득공은 역사와 지리 서적을 탐독하고 우리나라 역대 도읍지 스물한 곳의 정취를 칠언절구 한시 43수에 담았다. 그가 첫 번째로 노래한 곳은 바로 대동강물이 적시는 고조선 왕검성이었다. 고조선의 도읍은 오늘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제가 돼버렸다. 논란에 그치지 않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고려·조선 학자들도 평양설과 요동설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다수설은 평양설이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썼고 아사달은 개경 동쪽의 백악궁, 태백산은 묘향산이라고 주를 달았다. 모두 압록강 이남이다. <동국통감>, <동국지리지>, <동사강목>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이 압록강을 넘지 않았다고 했다. 정약용은 고조선의 도읍은 한반도 안에 있었지만 뒤에 요서를 점령하고 연(燕)과 국경을 접했다는 의견을 내놨다.


요동설도 만만치 않았다. 홍여하는 <동국통감제강>에서 진번을 요양, 패수를 요하에 비정하고 고조선 요동 중심설을 제기했다. 요동설은 실학자 이익, 박지원을 거쳐 근대 역사가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국내 학계에서 중심지 이동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조선은 요동을 중심으로 연맹국을 이뤘으나 기원전 4세기 이후 철기로 무장한 중국 세력의 위협이 거세지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신석기문화를 일구고, 예맥조선은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 바야흐로 철기문화를 탑재한 새로운 조선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시대전환의 분수령은 기원전 3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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