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어렸을 때 ‘무궁화’ 노래를 부르다 보면 궁금했다. 어째서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일까? 삼천리강산에 매화도 피고, 벚꽃도 피고, 진달래도 피는데 콕 집어서 무궁화란다.
알고 보면 역사가 있다. 무궁화는 고조선 때부터 이 강산에 많이 피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엔 “군자의 나라에 목근화(木槿花)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군자의 나라는 조선이고, 목근화는 무궁화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근화지향(槿花之鄕), 줄여서 근역(槿域)이라고 불렀다.
<산해경>은 훗날 서진의 곽박이 정리했지만 원래 춘추전국시대 중국인의 신화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그 시대 중국 사람들은 동방에 조선(朝鮮)이 있음을 알고, 그곳에 사는 동이(東夷)에게 호감을 나타냈다.
“동해의 안쪽, 북해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중국의 동해는 우리나라의 서해이고, 북해는 발해(渤海)를 가리킨다. 나라가 동해의 안쪽, 북해 모퉁이에 있고 사람들이 물가에 산다고 했으니 대체로 요하와 대릉하 일대를 고조선의 본거지로 본 것이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다는 것은 천신(天神) 숭배와 천손(天孫) 의식을 나타낸다. 고조선의 단군신화가 어른거린다.
풍속이 어질고 도리로 다스린다는 뜻에서 ‘군자국(君子國)’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했다. 유가를 창시한 성인 공자(孔子)가 가서 살고 싶어 했다는 설도 있다.(<후한서> 동이열전 서문)
그러나 이런 인식에는 신세계에 대한 민간의 환상과 동경이 배어 있다. 국제 관계는 이와 달리 냉혹하다. 인접한 나라와 종족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특히나 중국은 자신들만이 문명국이요, 천하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 주변에 사는 이웃들을 깔보고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곤 했다.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관자(管子)>는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재위 기원전 685~643년)을 중원의 패자(霸者)로 만든 재상 관중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관중이 환공에게 천하의 일곱 가지 귀중한 예물을 알려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로 조선의 문피(文皮), 곧 호랑이 가죽을 들었다. 기원전 7세기에 고조선이 중원과 교역하고 주목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환공은 사방의 이민족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관중에게 불평한다. 자신의 다스림을 거역하는 일이 천하에 퍼져 패권 질서를 해칠까 두렵다는 것이다. 관중은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이민족의 예물에 좋은 값을 쳐주라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의 호랑이 가죽은 천금의 가치가 있으니 넉넉히 값을 쳐주면 멀리서도 환공에게 문안하러 올 것이라고 했다.
환공은 조선이 입조(入朝)하기를 바랐다. 신하로서 조정 회의에 참석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연나라에 침입한 산융족을 쫓아낸 경험이 있었다. 연나라의 동쪽에 자리 잡은 고조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은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를 갖고 있어 중국에 쉽게 고개 숙이지 않으리란 걸 간파했다. 그래서 정치적 복속보다는 교역과 이득으로 요리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로 접어들면 지금의 베이징이 본거지였던 연(燕)이 조선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두 나라의 관계가 험악해진 데는 지리적 인접성이 크게 작용했다. 난세에 이웃사촌이란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웃이야 말로 가장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삼십육계 중 제23계가 ‘원교근공(遠交近攻)’인 것도 그래서다. 전국시대에는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이웃 나라를 공격하는 책략이 효과를 내며 통용되었다.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이며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산해경>은 열양이라는 지명을 거론하며 연나라가 동쪽으로 고조선과 접했음을 시사했다. <전국책(戰國策)>에도 유세가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기원전 361~333)에게 변론하는 대목에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원전 4세기경 연나라의 동쪽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뜻이다.
문공의 뒤를 이은 연나라 역왕(재위 기원전 332~321)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동쪽의 조선을 공격하려고 했다. 고조선도 질 수 없었다. 연과 똑같이 왕호를 쓰며 군사를 일으켜 역공에 나선 것이다. 이때 조선의 대부 예(禮)가 양쪽 군주를 설득하여 군사 충돌을 겨우 막았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결국 3세기 초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꾹꾹 눌러둔 압력이 컸던 만큼 전쟁의 결과도 자못 심각했다.
“연(燕)이 장군 진개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했다.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연나라의 고조선 침공을 기술하고 있다. 연은 소왕(재위 기원전 311~279) 때인 기원전 3세기 초에 국력을 크게 떨치며 전국칠웅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때 연나라 장수 진개가 내몽골의 유목민족인 동호(東胡)를 쳐서 멀리 쫓아내고 뒤이어 요동으로 나아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했다.
고조선은 연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땅을 2천여 리(약 800킬로미터)나 빼앗겼다. 실측거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수백 킬로미터는 물러났다고 봐야 한다. 새롭게 경계를 이룬 만번한(滿番汗)은 지금의 랴오닝성 가이저우(蓋州) 부근으로 추정된다. 요동반도의 북쪽 입구, 천산산맥이 바다로 내려앉는 그곳에서 연나라와 조선이 대치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뒤집어보면 종전까지 고조선의 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드러난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은 연나라의 침공으로 “마침내 조선이 약해졌다(朝鮮遂弱)”라고 했다. 다시 말해 그전에는 고조선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만번한, 곧 가이저우에서 2천여 리를 되짚어가면 고조선이 지배했던 서방 강역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중국식 과장법의 거품을 빼고 서북쪽으로 300킬로미터면 요하를 건너 대릉하의 요충인 조양(朝陽)에 이르고, 서쪽으로 400킬로미터면 훗날의 산해관을 지나 난하 하류의 갈석산(碣石山)에 닿는다. 조양은 고조선을 상징하는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이다. 갈석산은 전국시대에 중원의 동쪽 끝이라고 여긴 곳으로 연나라 수도 계(薊, 지금의 베이징)에서 말 달려 하루 거리다.
정리해 보면 3세기 초 연나라의 침공을 받기 전에 고조선은 요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요하 너머 대릉하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고, 난하 유역까지 진출해 연나라를 위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에 필적할 만큼 국력이 셌다고 봐야 한다. 비록 연나라의 침공으로 예상보다 큰 타격을 입었지만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나라 소왕은 악의와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해 선왕 때 제나라의 침략으로 망할 뻔했던 나라를 재건한다. 기원전 284년 연은 조, 위, 한, 초, 진과 연합해 제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이듬해엔 단독으로 제의 수도 임치를 함락시켜 궁실과 종묘를 불태워버렸다. 악의는 제나라 성 70여 개를 빼앗아 연의 군현으로 삼았다. 고조선 침공은 이렇게 연나라의 군세가 막강할 때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연의 명장 진개는 후일 자객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진무양의 할아버지다. 그는 일찍이 흉노에 인질로 가서 그들의 신임을 얻고 북방의 여러 이민족에 대해 파악했다. 연나라로 돌아온 진개는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내몽골에 있던 동호를 습격했다. 인질 생활을 하면서 동호의 지세와 약점을 알아낸 덕분이었다. 동호는 패주하여 1천여 리나 물러가야 했다.
진개는 내몽골에서 곧장 고조선으로 쳐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진군했다는 말이다. 고조선이 연의 침공을 막지 못하고 땅을 2천여 리나 빼앗긴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위략>의 기록은 너무 소략하므로 이 가설을 갖고 실제 전투 상황을 개연성 있게 추론해 보겠다.
당시 연에 대한 고조선의 방비는 발해만을 따라 요서회랑을 지나는 길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중원과 요동을 잇는 요서회랑은 길이 좁아 행군하는 군사들이 길게 늘어서야 한다. 고조선 병력이 이곳에 매복했다가 기습하면 연나라 군대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반면 동호가 차지했던 내몽골 방면은 방비가 허술했다. 고조선은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동호와 손잡았다. 같은 편이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군사가 충분히 배치되지 않았다. 연나라 군대가 동호를 쫓아내고 서북쪽에서 치고 들어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다.
반격에 나선 고조선이 1차 저지선을 구축한 곳은 요동평원,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瀋陽) 부근이었다. 여기저기서 급하게 소집한 부족 연합 병력이 청동 투구에 구리 징 박은 갑옷을 갖추고 적을 맞았다. 이윽고 나타난 연나라 원정군은 철제 무기를 번뜩이며 공격적으로 포진했다.
드디어 벌판에서 대회전이 펼쳐졌다. 고조선 연합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중원의 군세를 막아내지 못했다. 저들은 제나라 수도 임치를 불바다로 만들고 북방 이민족 동호를 단숨에 격퇴한 연의 정예 병력이다. 게다가 우수한 제철 기술로 벼려낸 창과 칼, 화살촉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고조선에도 철기가 들어오기는 했다. (고고학 발굴 자료를 보면 기원전 3세기 경에 요동과 한반도에도 철제 도구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은 연나라에서 들여온 덩이쇠를 두드려 농기구와 각종 연장을 만드는 수준이다. 무기는 여전히 청동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중원에서는 전국시대에 철제 무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결국 요동평원의 1차 저지선은 뚫리고 말았다. 사기도, 무기도 연나라 원정군이 우세했다. 진개는 병력을 이끌고 천산산맥을 따라 남하했다. 고조선 연합군은 천산산맥의 남서쪽, 요동반도의 북쪽 입구에 2차 저지선을 구축했다.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만번한이다.) 이곳은 산과 강과 바다가 만나 질척한 습지를 이루고 있었다.
연나라 원정군은 습지로 들어섰다. 말도, 사람도 발이 푹푹 빠져 제대로 운신하기 어려웠다. 이때 고조선 궁수부대가 나타나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었다. 진개는 뒤로 물러나 병력을 정비하기로 했다. 연나라 원정군이 후퇴하여 구릉지대로 접어들자 갑자기 매복하고 있던 고조선 연합군이 쏟아져 내려왔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간신히 물리쳤지만 이번에는 고조선 유군(遊軍)이 나타나 치고 빠지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결국 양군은 만번한에서 대치 국면으로 들어갔다.
이상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공을 역사, 지형, 군사 지식 등에 근거해 추론해 보았다. 그 후 원정군은 수비 병력만 남겨두고 회군했을 것이다. 장거리 원정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보급이다. 군량미가 떨어지고 있는데 대규모 병력이 원정지에 하염없이 머물 수는 없다. 연나라는 후속 조치로 새로 정벌한 지역에 방벽과 요새를 쌓았다.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요동군 등 치소도 설치했다.
고조선은 이때 요동 지역에 두었던 왕검성을 대동강 유역으로 옮겼을 것이다. 강적이 코앞에 닥쳤으므로 일단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다. 시련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고조선에까지 복속을 강요했다. 진시황의 거대한 장성이 요동을 향해 뻗어왔다. 그러나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입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 패권주의에 맞선 것이다.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과 항우가 패권을 다툴 때는 부왕의 아들 준왕(準王)이 고조선을 다스리고 있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고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되자 중국 유이민들이 대거 동방으로 흘러들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국민들이 많았다. 준왕은 그들을 고조선의 서쪽 땅에 머물게 하였다. 고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다. 고조선은 중국계 유이민을 받아들여 군사력과 생산력을 키우고 서쪽 영토를 넓혀나갔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항우를 꺾고 한(漢)나라가 중원을 차지했지만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기원전 195년 한고조 유방이 죽고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옛 연나라 땅이 크게 요동쳤다. 이때 동쪽 변경의 세력가 위만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조선 상투와 복장을 하고 국경인 패수(浿水)를 건넜다. 고조선으로 망명하려고 한 것이다.
위만은 지난날 연나라에 빼앗긴 고조선 서방 강역 출신으로 보인다. 그 땅은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배를 받았지만 고조선 사람들의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위만의 무리가 건넌 패수는 지금의 요하로 추정된다. 강 건너편은 연나라가 점령했다가 진한 교체기 때 물러난 땅이었다. 이곳에서 위만은 왕검성의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담대한 제안을 했다. 고조선 서쪽 변경에 머물게 해주면 중국 유이민들을 끌어모아 나라의 든든한 방벽이 되겠다고 한 것이다.
준왕은 솔깃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왕은 위만을 박사(博士)에 임명하고 100리의 땅을 내주며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고조선은 각지의 부족들이 독자적으로 다스리면서 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는 연맹왕국이었다. 위만도 박사로서 서쪽 변경을 통치할 권한이 생겼다. 중국계 유이민뿐 아니라 고조선 원주민까지 아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위만은 상하장(上下鄣)을 거점으로 삼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시대 조류를 읽고 철을 제련하여 철기를 생산하는 야철소를 세웠을 것이다. 중국 망명객들 가운데 야철 장인들을 뽑아 작업을 맡겼을 것이다. 철기가 곧 먹거리요, 힘이 되는 시대였다. 농사를 잘 짓고 수확을 늘리려면 튼튼한 철제 농기구가 필수다. 굳센 철제 무기를 갖춰야 전쟁에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 먹여 살리는 일이, 지키고 빼앗는 싸움이 철기의 우열에 달려 있었다.
중국 이민자들도, 고조선 원주민들도 우수한 철기를 손에 넣기 위해 상하장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위만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꿰뚫어 보는 인물이었다. 전란의 시대에 힘없는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은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철기군단이 등장했다. 오로지 위만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충성스러운 군대였다.
무력과 재력이 갖춰지자 상하장의 통치자는 숨겨둔 야심을 드러냈다. 위만은 왕검성에 전령을 보내 한나라가 열 갈래로 군대를 나눠 쳐들어온다고 알렸다. 준왕은 왕검성에서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 부족 연합군을 소집했다.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위만의 철기군단이었다. 그들은 숙위를 맡겠다며 성안으로 들어와 돌연 왕의 처소를 포위했다. 기습 쿠데타였다. 준왕은 신하들과 함께 왕검성을 탈출해 남쪽으로 달아났다. 위만은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위만조선의 시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