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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Nov 17. 2020

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뚝딱 요리

아빠의 레시피북


Ep.0

올해 5월,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안 좋아진 아빠의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빠는 두 번째 실직을 맞았고,


요리를 시작했다.

 

아빠는 원래도 요리를 꽤 하던 사람이었다. 배곯면 다 하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그는 오랜 자취 생활을 통해 생활(이라고 우기는) 야매 요리를 터득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요리는 사뭇 독특한 구석이 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한 이후에는 꼭 “두 번은 못해. 어떻게 한 건지 나도 몰라.”라고 덧붙이는데 이는 은근히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

어릴 적 아빠의 요리에 관한 한 가지 인상 깊은 기억은 뿌셔뿌셔 라면땅이다. “뿌셔뿌셔로도 라면을 끓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아빠의 호기심은 뿌셔뿌셔 라면땅이라는 초유의 음식을 만들어냈고


결과는 처참했다.

 

그렇지만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그 어떤 시련과 좌절에도 결코 프라이팬과 주걱을 멀리 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요리 세계를 구축해갔다. 무소의 뿔 같은 그의 요리를 마주할 때면 난 왠지 터키 행진곡을 틀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아아, 실로 위풍당당한 요리사와 웅장한 요리가 아닐 수 없다.



 

좌우간 아빠는 두 번째 실직 라이프를 요리로 채우는 중이다. 그는 가끔 실패하고 자주 성공한다. 엄마의 도시락 요리는 아빠의 몫이 된 지 오래이며 본가에 갈 때면 아빠의 한 상차림을 볼 수 있다. 나는 아빠의 뚝딱뚝딱 요리 시간을 구경하는 것이 퍽 즐겁다. 


무직의 딸이 구직은 내팽개치고 글에나 몰두할 때 실직의 아빠는 구직 활동도 열심히 하며 요리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부친의 근면성실 라이프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딸은 또다시 글이나 쓰려고 한다. 


물론 아빠는 “계량도 해야 하고, 시간도 재야 하고 영 복잡한 게 아니다.”라며 손을 내젓기는 했으나, 

또 물론 그가 같은 요리를 두 번은 할 수 없는 비운의 숙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그의 요리는 철저하게 요리를 하는 그 순간의 감각에 의해 결정된다. 그 말은 즉 그의 요리가 계획적이라기보다 즉흥적이라는 것이다)


... 까지 쓰고 보니 레시피북이라는 제목을 달아도 될지 앞날이 깜깜하지만


아무튼 나 역시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에 물러설 수 없다. 제아무리 효도와는 거리가 먼 딸이라지만 같이 즐거운 추억이라도 쌓으면 좋지 않나. 


그리고, 막상 해보면 재밌을 걸?




*

그리하여 시작하는 무직자 딸을 둔 실직자 아빠의 한 끼 요리! 정확한 계량 같은 것은 기대 마시라. 성공하면 다행, 실패하면 낭패 그뿐인 것을!





가정의 평화를 위한 p.s 

딸과 남편이 각각 무직과 실직을 도맡아 하는 초가정적 재난 사태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건 단연 바깥양반의 몫이다. 조여사의 바깥일 역시 마음 다해 응원한다. 그러니 엄마, 삐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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