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호화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월 Dec 28. 2020

넷플릭스 <레베카>

맨덜리의 신(新) 예수, 시대의 십자가를 진 새로운 차원의 구원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동경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의 예수가 그러했듯, 이곳 맨덜리에서의 레베카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베카는 이미 이 세계를 떠난 망자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이 없다. 그를 떠올리는 말들은 수없이 되풀이된다.

왜 그런 거슬리는 사람들 있잖니. 모두의 마음을 홀려버리는... 남자, 여자, 아이들, 동물까지. 우리 같은 한낱 인간들은 대적할 수조차 없지.

두려움을 모르는 분이었죠... 아마도 그분은 세상 모든 창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웠을 거예요.


새로운 예수의 등장

한때 맨덜리에 존재했을 때보다 존재하지 않게 된 이후의 존재감이 더욱 확실한 듯 보이는 이 여자, <레베카>라는 이름을 단 영화에서조차도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이 인물은 영화의 키를 쥔 막강한 인물이자 영화를 관장하는 지배자이다. 맨덜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 그로 인해 모두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지 않나. 죽어서도 부재하지 않는 자, 말하자면 레베카는 맨덜리의 신(新) 예수인 셈이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레베카가 마치 신처럼 묘사되는 장면은 또 있다. 우연한 계기로 처음 보트하우스에 가게 된 '나'의 앞에 등장한 벤. 그는 레베카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She... She gone into the sea, ain't she?
바닷속으로 들어갔었지, 그래

한 사람의 죽음을 이보다 더 신비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레베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말을 전하는 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자연스레 물 위를 걸었다는 예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신(神) 레베카의 가장 충실한 사도, 댄버스 부인


레베카가 맨덜리의 신(新) 예수라면 댄버스 부인은 그 신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 베드로이다. 댄버스 부인은 맨덜리의 주인이던 레베카의 자리를 대체하는 '나'에게 온갖 방식으로 위협을 가한다. 맥심과 '나' 사이의 불화를 유도하고 '나'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 '나'가 스스로 이 맨덜리 땅을 떠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댄버스 부인에게 있어 레베카는 자신의 신이자 종교 그 자체이다. 그런 댄버스의 눈에 맥심의 새로운 부인이랍시고 나타난 '나'는 그저 레베카의 자리를 넘보는 파렴치한일 수밖에 없다.

You never replace her. You can't replace her.
넌 절대로 그분을 대신할 수 없어.
서슬 푸른 사도 댄버스.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레베카라는 신에 대한 믿음이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이처럼 댄버스에게 있어 레베카는 대체 불가의 유일신이다. 일찍이 16살에 아버지가 키우던 거대한 말을 완전히 복종시킨 바 있는 레베카. 댄버스는 '나'에게 너는 결코 레베카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이 일화를 전하는데 이때 그는 그 무엇보다도 "master"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한다. 더욱이, '나'를 맨덜리에서 조금 더 일찍 쫓아내지 못해 레베카가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이라며 "She won't stand for it(용서하지 않으실 텐데)."라는 말을 덧붙이는 장면에서는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 간의 주종관계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복종과 실망, 그리고 용서까지. 종교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골 단어들이 총출동한 모습이다.



새로운 신의 새로운 구원


신은 전지자이면서 지배자이고 동시에 구원자이다. 그렇다면 맨덜리의 새로운 예수 레베카는 어떻게 구원자로서의 면모까지 갖추는가?

레베카의 구원은 스스로의 행위로 기존 관습을 뒤집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남편인 맥심이 아닌 다른 남성들과의 유희를 즐기고, 결혼을 통해 새로이 부여받은 이름 '드 윈터 부인'을 거부한 채 자신의 소유물마다 'R'(자신의 이름 맨 앞 글자)을 새겨 넣는다. 자기 자신을 거듭 힘주어 말함으로써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피력하는 것이다. 당시 사회가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취급하며 행동 반경에 큰 제약을 두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레베카의 이러한 강한 자의식은 그 자체로 시대를 향한 저항이 된다.

출처: 트레일러 스크린 샷

이질적이기에 선구적일 수밖에 없었던 레베카, 그는 거대한 균열의 시작이다. 그 중, 가장 큰 균열의 흔적은 댄버스 부인에게서 나타난다. 레베카가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던 새로운 교리는 이윽고 댄버스 부인의 사고방식까지 바꿔놓기 때문이다.

Mrs. Danvers: Why  shouldn't a woman amuse herself?
어째서 여자는 즐기면서 살면 안 되는 거지?

그뿐인가, 댄버스 부인은 대놓고 "레베카 자신만의 삶"을 거론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던 레베카의 방식을 이야기하며("She lived her life as she pleased") 레베카가 가졌던 단단한 주체의식에 대해 말한다.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췄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댄버스 부인을 추동하는 힘이 신앙이었다면 '나'를 추동하는 힘은 단연 사랑이다. 그는 믿음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벗 삼아 집착과 사랑으로 똘똘 뭉친 'Team 레베카'에 대항한다.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의 합작으로 꼼짝없이 교도소에 갈 위기에 처한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 변화한다. 영화 초반, 댄버스 부인의 손 안에서 조종당하기만 하던 유약한 여성의 모습은 이제 없다. 그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댄버스 부인에게 맞서며 사랑하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레베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은 '나'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것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서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나'는 점점 더 강해진다. 강해진 '나'는 남편을 지키고 자신의 삶까지 지켜낸다.


사건이 전부 해결된 후, 자신의 신을 따라 죽을 준비가 된 댄버스 부인은 '나'에게 "You will never know happiness(당신은 행복을 알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건넨다. 결국에는 다시 '드 윈터 부인'으로 살게 된 '나'를 향한 독설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Yes, I will.
아니, 난 행복할 거예요.


이와 같은 결연함은 이미 싸워본 자, 무언가를 지켜내 본 적 있는 자에게서만 나타난다.

깨닫고 행동하는 여성/ 출처: 네이버 영화
Last night, I dreamt I went to Manderley again. I dreamt of Mrs.Danvers and of Rebecca. But this morning I woke up and left the dead behind.

어젯밤 난 꿈속에서 맨덜리로 돌아갔다. 그곳엔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가 있었다. 난 그들을 꿈속에 남겨두고 잠에서 깨어났다.

맨덜리 저택에서 무사히 살아서 걸어 나온 ‘나’에게는 앞으로의 삶이 남아있다. 공포의 감각을 일깨워준 댄버스 부인도, 레베카도 모두 죽어 사라졌다. 그들과 달리 ‘나’는 깨어났고 깨어난 이상 모든 것은 예전 같을 수 없다.  



스스로 신이 된 여자와 그의 가장 충실한 사도, 그리고 신의 대항마가 된 여성들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까 두려워 이혼도 못하고, 레베카가 죽은 뒤에는 살인죄로 교도소에 갈 뻔했던 맥심은 ‘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과 명성을 부지한다. 그러나 전부 예전의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생의 모습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상징과도 같던 드 윈터의 저택이 끝내 활활 타오르고, 드 윈터 부부는 맨덜리를 떠나 전 세계를 유랑하게 된다. 이제 맨덜리에서 드 윈터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출처: 트레일러 스크린 샷

고귀한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참으로 오래도 지속되어온 낡은 관습과 이념이 맨덜리 가문의 저택과 함께 모두 산산히 부서진다. 맨덜리 저택의 붕괴는 남성에서 남성으로 대물림되던 낡은 시대의 결말과 같다. 그리고 이 붕괴의 중심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이다.



레베카는 성적 대상화된 여성의 이름이자, 남편의 가족이 되지 못한 '악녀'의 이름이다. 누군가의 부인이기보다 그저 그 자신이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레베카에게 있어 드 윈터 부인이라는 칭호는 불필요한 족쇄였을 터. 그리하여 그는 단지 자신인 채로 남고자 한다. 탐닉의 대상 자리에 스스로를 놓은 뒤, 자신을 탐닉한다 착각하는 우매한 남성들을 한껏 비웃으며.

이와 반대로 드 윈터 부인의 원래 이름은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맥심과의 결혼으로 불행에 처하고 이름까지 잃은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는 상황에 그저 순응하지 않고 알고자 하며 바꾸고자 한다. 상황을 주도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 머리 쓰고 몸 쓰는 그는 맥심의 말마따나 이제 더이상 해맑고 철없는, 서툰 소녀가 아니다. 하여 결혼으로부터 비롯된 새 이름이 그를 대변한다 할지라도 그 이름은 실로 무력하다. 이미 무너진 저택과 집을 찾기 위한 방랑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나.


'드 윈터'라는 이름은 이제 드 윈터 부인이 새로 꾸려 나가는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넷플릭스 <파퍼씨네 펭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