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걸쳐 논밭을 일궈 오신 할아버지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무엇이든 첫 삽을 뜨는 게 중요하다고. 할아버지의 말씀은 사뭇 중의적이라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늘 고민에 잠겼다.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가, 어떻게 시작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건가.
그 말을 여러 번 곱씹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애초에 인간이 제 힘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가. 자못 서글픈 생각이지만 전혀 일리 없는 말도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 즉 출생조차도 결국은 태어나는 자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지 않은가. 익히 알다시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시작’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시작-당하고야만 존재들이다. 세상에 기투(企投)되고 피투(被投)된 존재들로서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갈 뿐. 근원의 시작은 퍽 절망적이다.
그러나 어떤 시작은 생각만으로도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진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이 ‘처음’이 시작된 순간만큼은 언제나 생생하다. 더욱이 그것이 애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을 때 기억의 유효성은 평생을 걸쳐 발휘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영화 <라라랜드>를 보았던 날이 그렇다.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혼자 영화를 보았던 그 날 나는 영화의 모든 것에 빠져 들었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 이야기도, 그들이 각자의 꿈을 좇아 움직이는 것도,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것도 전부 나를 설레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졌고 나의 생각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영화 리뷰 쓰기를 시작했다.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그것은 왜 좋은지에 대해 곰곰 생각하고 글로 적어보며 나를 동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 둘 알아갔다. 허나 글은 내가 말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까지도 맑게 비춰냈기에 쉬이 타인에게 보일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고 털어놓고 싶은 나의 첫 시작이었지만 아주 오래도록 이야기하지 못했다. 블로그는 언제나 비공개 상태였다.
비공개였던 블로그를 공개로 전환한 건 그 후로도 몇 편의 영화 리뷰를 쓴 다음이었다. 글을 오픈한 데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단지 점점 더 거대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던 이유에서였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 울타리를 세웠지만 차오르는 마음은 끝내 경계를 넘어 범람했다. 나는 사람들과 글을 나누었고 모르는 사람이 내 글에 하트를 눌러주었을 때는 오랜 짝사랑이 보답받은 것 같은 설렘을 느꼈다. 영화에서 시작된 설렘이 글쓰기의 설렘으로 이어지는 고리의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영화에 빠진 순간조차도 내 의지와 무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영화를 선택한 건 나였지만 거기서 어떤 기분을 느낄지 스스로 선택했던 건 아니다. 누구도 어떤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나는 이것을 앞으로도 쪽 좋아할 거야.”라고 다짐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천천히 물들어 가고, 지나고 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랑을 깨달을 뿐. 우리가 스스로 감동을 느끼고 애정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느끼고 사랑하는 일이 그리 귀한 경험처럼 대접받는 일도 없으리라.
하여 애정의 시작은 의지의 개입 없이도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그건 사람을 감동시키고 경이를 동반한다. 우리는 시시로 그러한 기억에 기대어 살고 그 기억을 근거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그 삶이 생생하다는 증거이다. 요컨대 사랑의 처음과 시작은 삶의 제세동기와도 같다.
하지만 매 순간 제세동기에서 비롯되는 자극만을 느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가 되면 손을 바꿔 일정한 박자로 스스로의 마음을 지압해야 한다. 처음은 단 한 번만 처음일 뿐 그 체험에서 비롯된 감정의 끈을 늘이려면 의지를 갖고 시작해야 한다. 필시 영화는 내 의지로 뜬 첫 삽은 아니었다. 그건 되레 얼결에 내 삽 위로 안착한 질펀한 진흙더미에 가깝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흙은 힘을 들여 털어낸다 한들 쉽게 떨어져 나가진 않지만 물기를 잃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계속 사랑을 붙들고자 한다면 사랑에 빠지는 수동적 행위와 사랑을 하는 능동적 행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같은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같은 방법이 매번 유효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된 시작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내 의지에 힘입어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자생적으로 생겨난 시작과 처음에 자발성을 더해 계속해서 자라나게끔 양분을 주는 행위, 그 의지의 시작이야말로 내가 가장 손꼽아 말하고 싶은 시작이다. 스파크가 튀었던 곳에 형체 없는 연기만이 자욱한 건 더없이 쓸쓸한 일이다. 황량하지 않기 위해서는 불꽃이 일었던 자리에 길을 내고 무늬를 만들어야 한다. 무늬를 잇고 이으면 어느새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림의 시작은 영감이 아닌 터치다. 우리의 터치는 삽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