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자폐 자녀를 둔 엄마의 성장 기록

by 예심





2005년 1월,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영화 <말아톤>을 보러 갔다. 자폐증 아들을 둔 엄마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였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는 장면이 있다. 아이와 아이엄마가 집으로 가는 길, 공사 때문에 임시로 막아놓은 골목을 돌아서 다른 길로 가야 하는 상황인데, 자폐증이 있는 아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늘 가던 길로 가야만 했는지, 괴성을 지르며 몸무림 쳤고 엄마는 그 아이를 달래고 잡아끌며 길 위에서 씨름을 벌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숨이 나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몸짓, 원활하지 않은 의사소통,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아이. 그 아이를 붙들고 하루하루 버티는 엄마의 표정 속에는 기진맥진과 절망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고, 끊임없이 설명해야 했으며, 사과해야 할 순간도 많아 보였다. 마음과 에너지는 오롯이 그 아이에게 쏠려 있었고, 그로 인해 관계의 갈등까지 떠안은 듯 보였다. 위로받을 곳 하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어린 마음과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얕은 경험으로 옆 친구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어떡하냐... 저건 진짜 사는 게 아니다."

동정은 가지만 나와는 무관하다는 마음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자폐성 장애 1급 자녀를 둔 엄마가 되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나는 몰랐다. 내가 그 영화 장면들과 마주하게 될 줄은.


나는 절망했고, 고군분투하다가 체념했으며, 다시 일어서려 애쓰다가, 지금은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고 적응하는 자리까지 왔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로-로스는 슬픔의 5단계를 제시했다. 자폐 자녀를 둔 부모들 역시 대체로 이 과정을 통과한다. 순서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충격과 부인에서 시작해 분노와 협상, 우울과 절망을 거쳐 수용에 이른다.


1단계 충격/부인 : “사람들이 잘못 보는 거야” “일부분만 보고 그렇게 판단하다니. 내 아이는 내가 잘 알아” 하며 현실 부정한다.

2단계 분노 : “누구 잘못인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분노는 주변과 자신을 향한다.

3단계 협상 :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아질 거야. ” “나아진 사례가 있잖아” 희망을 붙든다.

4단계 우울/절망 : 아무리 애써도 바뀌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력감과 슬픔이 밀려온다.

5단계 수용 : “내게 주어진 삶이다” 어려움을 끌어안고 감수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 책은 내가 이 다섯 단계를 지나며 성장한 경험의 기록이다. 수용하고 외상 후 성장에 이르기까지 십 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하지만 가끔 우울의 단계나 분노 같은 단계로 퇴행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그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금세 회복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나날들도 내 삶의 일부고 , 나라는 사람이 건축되는데 필요했던 자재들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나와 같은 길을 지나고 있거나 이미 지나온 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과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행복이 정점에 오르면 언젠가 하강이 오고, 고통이 바닥을 치면 언젠가 반등이 온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고통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인생 방탄복이 된다. 지나간 고통은 당신을 무너뜨리는 대신, 당신을 단단히 무장시킨다.


( 인생 총량의 법칙 100문 100답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