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하다

by 예심


밤이 깊었던 어느 날. 나는 잠들지 못한 채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아이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 집에 와?]

곧이어 답장이 왔다. 차갑고 짧았다.

[짜증 나니까 전화하지 마. 이혼 서류 가져가면 도장이나 찍어]


그 사람은 그때까지 한 번도 내게 이혼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말투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이혼을 안 해준다는 핑계를 누군가에게 대고 있나 보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보낸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그 순간, 알 것 같았다.

‘아, 이 여자구나. 그동안 음원 사이트에서 내 음악들을 지워온 사람이.’


나는 연애 시절부터 그 사람의 아이디로 음원 제공 사이트에 접속해 음악을 들었다. 그 안에는 내가 오랜 시간 모아 온 음악 목록들이 있었다.

비 오는 날 듣는 음악, 설거지할 때 듣는 음악,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듣는 음악……

그 소소한 목록들이 이상하게도 자꾸 삭제되어 있었다. 아이 아빠에게 전화해 물으면 그런 적 없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음악 목록들은 계속해서 지워졌다. 아주 고의적인 속도로. 그 아이디를 사용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 취향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었던 것이다.


몇 달에 한번 집에 들어오는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면 증거는 넘쳐났다.

“자기가 있어서 이 겨울이 하나도 안 춥다” “저녁 김치찌개에 고기를 넣을까 말까”

살림을 함께 사는 사람만이 주고받을 법한 적나라한 문장들이 화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그 내연녀를 직접 찾아간 적은 없었다. 내가 얼마나 겁쟁이였는지 말해보겠다.


이 사태를 깊이 파고들면 정말로 부부 사이가 끝나버릴 것 같았고, 상대의 얼굴과 목소리를 직접 알아버리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화려할 것 같은 외모, 이 남자의 마음은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적인 태도와 당당할 것 같은 말투. 그 앞에서 드러나게 될 나의 초라함과 수치심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또한 심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에게 의존하고 있어야만 했던 나 자신에 대한 혐오스러움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느껴질까 봐 두려웠다.


물론 다른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간통죄가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두 사람을 구속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손으로 그런 일을 벌인다는 생각은 몸서리가 쳐졌다.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도구를 준비하고 한 단계, 한 단계 노트에 순서를 적어가며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만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죽음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도 나의 나약함이 실행을 막았다. 나는 나를 겨우 현실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심한 우울과 자살 충동, 불안과 피로 속에서 나는 조금씩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혼을 간절히 바라던 당시의 내연녀 때문이었는지 아이 아빠는 법원에 가자고 했다. 그는 말했다. 이혼하면 내가 한부모 가족 아동 양육비 같은 것도 받을 수 있어서 형편이 나아질 거라고. 슬프지도 않았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멍했다. 그 사람 역시 어떤 자백도, 사과도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협의이혼을 했다. 그렇게 나는 삼십 대 초반에 이혼녀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살고 있지 않았고, 그에게는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이혼이 되었다고 해서 생활에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사업실패로 도망을 다니고 처지었기에 나는 자녀양육비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사랑이었을까. 아마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소속감을, 그 누군가와의 연결감이 필요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대상만 바뀔 뿐 늘 다른 누군가가 있었고, 기대는 점점 옅어졌다.


친구에게조차 위로받지 못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결혼한 친구들 중에는 나처럼 인생의 곤고함에 빠진 사람이 없었다. 만나고 나면 상대적 박탈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용기를 내어 상황을 털어놓았을 때도 있었지만, 뒷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왜 내 눈물은 빨간색이 아닌 걸까. 이렇게나 원통한데.


내 감정이 너무 서슬 퍼래서 오뉴월에 서리라도 내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S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그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훗날 심리학을 배우며 알게 된 것이 있다. 기질적으로 자극 추구 성향이 높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 기질이 강할수록 행동억제가 힘들어질 수 있다.

(그의 성장과정이나 생활환경에서도 외도의 사건이 많았다. 학습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애초에 그의 자신감에 끌렸던 것 같다. 사교적이고, 적극적이며,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모습이 나에게는 듬직하게 느껴졌었다. 나와는 정반대였으니까.


나는 위험 회피 기질이 강하다. 조심스럽고, 머뭇거리고, 겁이 많아 행동이 억제되어 있다. 그런 기질과 현명함 부족이 더해져 현실을 직면하지 못했다. 화낼 것은 화내고, 사과받을 것은 사과받고, 서로의 불만을 말하며 조율했어야 할 시간들을 나는 지나쳐버렸다.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 내 안에는 늘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고여 있었다. 사람은 자주 사용하는 감정 상태에 머무르려는 존재라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울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산후 우울증과 아이의 문제가 겹치며 더욱 우울에 깊이 매몰되어 있었다. 나 자신과 집안을 단정히 돌보지 못했고, 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흥미와 재미 추구가 강했던 그 사람은 더욱 이 가정이 숨막혔겠지.


대체 양육자가 있었다면 나 역시 그 사람처럼 집에서 최대한 벗어나려 했을지도 모른다. 나만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기에 나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만약 내가 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고, 배우자에게서 받지 못한 애정을 채워주는 유혹자가 있었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가정의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했던 젊은 나이에, 굳건한 신념마저 없었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사람에게 원망의 감정이 없다. 물론 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마음도 없다. 나를 북돋아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이제는 내게도 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는 모르지만, 중심 없는 혼돈의 삶을 되풀이하지 않고 그의 타고난 강점을 빛내기를. 그의 곁에 중심을 잡아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존재가 있어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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