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히 살아야 하는 시대 >
요즘은 층간소음에 예민해진 시대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에도, 믹서기를 돌리는 소리에도 “조심해 달라”는 말을 듣게 된다. 서로의 생활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겹쳐지는 공간에서 생활하니 그렇다.
그런 시대에서 내 아이가 내는 소음은, 내가 생각해 봐도 상식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아이의 웃음과 울음은 내가 들어도 언뜻 비명 소리처럼 들렸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희망이의 목소리는 벽을 타고, 바닥을 타고, 천장을 타고 이웃의 일상 속으로 무단 침입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들렸을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고, 그래서 더 숨고 싶었다.
< 다섯 번의 이사는 같은 이유 >
희망이를 키우며 총 다섯 번의 이사를 했다. 이사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 층간소음.
민폐를 덜 끼쳐보겠다는 마음으로 1층 만을 고집하며 이사를 가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의 고성은 위층과 옆집, 대각선 집까지 흔들어놓았다.
“층간소음 때문에 너무 괴롭습니다. 자제 부탁드립니다.”
노란색 포스트잇이 현관문에 붙어 있던 날도 있었고, 경비실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된 말도 있었다. 벨을 누르고 직접 찾아오는 이웃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어떤 날은 “조용히 좀 시키세요.”라는 말과 함께, 몸을 틀며 돌아서면서까지 째려보던 20대 청년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 밤새 뒤척였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학대가 의심된다며 경찰에 신고한 이웃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가 가진 장애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물론 그 설명이 이웃의 여가와 숙면을 방해하는 일상의 손해를 덮어줄 수는 없었다. 나조차도 내 아이가 내는 소음이 견디기 힘들었는데, 이웃이 그것을 어떻게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었겠는가.
< 최대한 소음을 줄여보자 >
할 수 있었던 노력은 제한적이었다. 1층이라 해도 아이가 세게 뛰면 공유된 벽이 울렸기에 매트를 깔아 두었고, 소음이 가장 잘 전달되는 화장실 문은 늘 닫아두었다. 창문도 늘 닫고 살았다.
희망이는 텔레비전 볼륨을 끝까지 올리고 싶어 하는 강박이 있었기에, 텔레비전을 아예 없애버리는 선택도 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안정되길 바라며 정신과 약의 용량을 늘렸고, 소리를 크게 낼 때마다 야단을 쳤다.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 아이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상황을 불러왔다.)
그리고 집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또다시 이사를 준비했다.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통을 호소하던 얼굴을 마트나 골목에서 다시 마주치는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눈길에서 연민보다 경멸을 먼저 느꼈다.
‘저 집이구나.’
‘소문난 집.’
마치 그런 수군거림을 실제로 들은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 무서워서 버티기 힘들어 >
어느 날, 내 고충을 들은 남동생이 끔찍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군대 후임 중 한 명이 자취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떠들다가 자제력을 잃은 이웃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였다. 동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기도 층간소음에 시달리면 욱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요즘은 특히 층간소음에 예민한 시대이니 누나도 조심하라고. 그 말이 내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뉴스에서 비슷한 사건을 볼 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웃집에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 집 앞에 인분을 뿌리는 사람, 욕설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누적된 분노 끝에 자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친정집이 가까웠다면 얼마나 의지가 되었을까.
그런 마음이 쌓이다가 어느 날, 나는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욕먹잖아!”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 잘못에만 사과하면 되는 삶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이유로 사과해야 하는 인생이 되었다. 양육의 어려움, 늘 부족한 잠, 누군가 쫓아올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살다 보니 면역력은 바닥이 났고 감기는 떨어질 줄 몰랐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 네 번째 집에서 있었던 일 >
네 번째 이사 간 집은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복도식 아파트 1층이었는데, 한쪽 옆집에는 귀가 어두운 어르신이 살고 계셨고, 다른 한쪽에는 가정 어린이집이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은 이사 온 나에게 먼저 와 아이들 소음이 심할 수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 소음이 더 심하다고, 오히려 내가 더 부탁드린다고. 그리고 위층에는 휠체어를 타는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우리 아이의 상태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며칠 지났을 때, 할머니는 다급히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이 소리가 너무 커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사과했고, 아이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후로도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힘드셨는지, 조용히 하라는 신호로 바닥을 쿵쿵 고의적으로 내리찍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주신 날이 더 많았다. 입이 열 개라도 나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여름날, 분리수거를 하다 위층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손녀딸이 자폐 검사 권유를 받아 딸이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하셨다. 딸이 고층 아파트에 살다 보니 엘리베이터를 탈 일이 많은데, 아이가 큰 소리를 내면 황급히 입을 막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딸이 아랫집 아이 엄마에게는 절대 핀잔을 주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며, 그간 미안했다고 사과하셨다. 나는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와 가까스로 얻은 교훈, 그럼에도 계속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해 드렸지만, 그것이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위층 어르신은 바닥을 내리 찧으며 원성을 표현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어르신 집에 딸과 손녀가 놀러 오는지, 위층에서도 큰 소음이 났다. 나는 이웃들이 느꼈던 그 불편함을 고스란히 느끼며 기꺼이 견뎠다. 단지 내에서 그 어르신과 마주칠 때마다 격려의 눈인사를 나누었고, 서로가 일으키는 층간소음을 알기에 우리는 종종 멋쩍어했다.
< 층간소음 걱정 없는 집으로 >
몇 년 뒤, 나는 LH 전세임대주택으로 작은 단독주택에 이사했다. 집은 낡았고 비도 조금 샜고 길고양이도 많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쫓아오지 않을 집이라는 사실이 모든 조건을 이겼다.
창문과 화장실 문을 열어두고 살 수 있었고, 아이의 소음에 나도 너그러워졌다. 집에서 아이와 술래잡기를 하고,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 웃을 수 있었다. 또한 이웃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인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웃과 마주치면 죄인 느낌이 안 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사과의 의미가 없는 음식과 마음을 비로소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만족감은, 지나온 어려운 시간이 있었기에 더 깊다.
차를 타고 예전에 살던 아파트나 빌라 근처를 지날 때면, 고개를 조아리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조용히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된다. 상처가 모두 아문 것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