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달장애인 부모들 사이에서도 비교는 존재한다 >
나 역시 대부분의 엄마들처럼, 현실을 직시한 이후 가장 먼저 치료센터를 찾았다. 집에서 몇십 분 거리의 아동발달센터에서 언어치료, 감각통합치료, 놀이치료, 미술치료까지 가능한 스케줄을 빼곡히 채웠다.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필요했다. 아이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에 의지했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지나면 치료센터는 아이들과 부모들로 북적였다. 발달의 속도가 세상의 평균에서 벗어난 아이를 키운다는 공통점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연결될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연대가 싹트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하루에 치료를 몇 개나 다녀.” “나는 매일 다녀.” “그래도 우리 애는 기저귀는 안 차.” “말은 할 줄 알지?” “우리 애는 글자를 써.” “우리 애는 적어도 자해는 안 해.” “우리 애는 정신과 약 먹을 정도는 아니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굳이 꺼낼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들이, 그 공간에서는 자랑이 되었고 특권처럼 작동했다. 아이의 기능 하나하나가 비교의 단위가 되었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아이를 가늠했다.
삶이 버거울수록, 사람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다는 감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희망이는 타해는 안 하니까… 자해만 하니까….’ 지금 떠올리면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장애 안에서도 서열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안도하려 했던 나의 마음이 부끄럽다.
< 치료실과의 전쟁 >
치료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정보와 비용, 시간과 체력이 뒤엉킨 곳이었다. 어떤 엄마는 여러 치료센터를 전전하며 고가의 수업을 듣고 있었고, 어떤 치료사는 ‘이 사람에게 맡기면 아이가 눈에 띄게 좋아진다’는 소문을 달고 다녔다.
그 시기, 아이 아빠와의 연락은 원활하지 않았고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친정엄마의 금전적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때였기에, 다른 집만큼 아이에게 투자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치료실 안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따로 있었다. 발달이 지연된 아이들이 모인 공간에서조차, 내 아이의 장애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희망이가 치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대기실까지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치료가 끝난 뒤 이어지는 부모 면담 시간에는 아이도, 선생님도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어머니, 제 귀가 먹먹하네요.”
쓴웃음을 지으며 건네는 말속에서, 숨이 가쁜 선생님의 호흡이 느껴졌다. 열심히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셨지만, 그곳에 가는 시간은 희망이에게도, 나에게도 곤욕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면 기다리는 시간이 괴로워 고성을 질렀고, 치료실에 들어가면 지시받는 상황이 힘들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아이의 짜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장애인 콜택시 운전사들마저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집에 도착하면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가정이 치료의 연장선이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럴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쌓였다.
혹시 선생님과의 궁합이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싶어 다른 치료실도 옮겨 다녔고, 아이의 적성을 못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음악치료와 수영까지 시켜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집이 세고 목청이 커서, 어딜 가나 구경거리가 되는 상황만 반복되었다.
< 고집이 아니야 >
희망이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송두리째 흔들린 사건이 있었다.
그날도 치료를 마친 뒤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는 다시 차에 오르려 했다. 나는 또다시 막무가내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만해.”
희망이를 다그치며 큰소리를 냈고,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기 위해 몇 발자국을 옮겼을 때, 이상한 허전함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망이의 신발 한쪽이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가 다시 택시에 타려고 했던 이유를. 택시 안에서 벗겨진 신발을 찾으려 했던 것이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 일을 떠올리면, 절망에 잠긴 희망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절망을 ‘고집’이라고 읽어냈던 나의 시선이 함께 떠오른다.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엄마의 팔을 택시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던, 말 못 하는 어린아이의 완력이 떠오른다. 그 순간 아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아이들은 종종 자해를 한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좌절과 혼란이 몸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엄마마저 그 신호를 오해한다면, 아이가 세상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치료센터에서 끊임없이 울고 소리를 질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시기 희망이의 삶에는 ‘수용’보다 ‘지시’와 ‘통제’가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먼저 필요했던 것은 훈련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던 어느 날, 아이와 터벅터벅 걸으며 나는 화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희망아, 우리 이제 이거 하지 말자.”
이런저런 이유로 치료센터를 2년 조금 넘게 다닌 뒤, 우리는 치료를 중단했다.
< 치료실을 다니지 않아도 아이는 성장한다 >
발달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 대부분은 아이가 어릴수록, 특히 초등학교 시기까지는 치료실이 일상의 중심이 된다. 나 역시 전문가의 치료적 개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치료를 통해 아이의 인지 능력이 이전보다 끌어올려진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다만, 아이가 힘들어하고 엄마의 에너지까지 바닥난다면, 치료센터에 오가는 그 고된 시간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정서를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 불안해지는지, 어떤 자극에 민감한지,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지를 아는 것.
희망이는 차 소리를 싫어했고, 지시가 많아지면 금세 괴로워했다. 치료실 안의 장난감을 마음껏 가지고 놀고 싶은데, 시간이 되면 내려놓고 나가야 하는 상황을 특히 힘들어했다. 감정이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아이가 힘들어하는 영역에 더 오래 노출시키고 익숙해져야 한다며 밀어붙이는 방식은 어느 순간 폭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 성장은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텐데 말이다.
치료를 중단한 지 몇 년이 흐른 뒤, 아이는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고 어색하지만 언어 발화도 가능해졌다. 어느 날은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요를 들으며 화면에 뜨는 자막을 따라 읽고 쓰며 글자를 익힌 것이었다. 지하철 노선도가 인쇄된 브로드마이드를 반복해서 보며, 노선도를 외워 필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 짜파게티만 먹어 영양실조를 걱정하며 미숫가루를 섞어 먹이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는 밥과 반찬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모두 다 아주 자연스럽게 오랜 시간에 걸쳐 얻게 된 결과다.
개인차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학교와 가정이라는 생활환경이 주는 학습 효과 역시 결코 작지 않다. 오감과 인지를 자극하는 배움은 생각보다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여전히 청각이 예민해 특정 소리를 무서워하며 귀를 막기도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치료센터를 다니지 않아도, 아이는 느리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자라난다는 것을.
그 사실을, 나는 조금 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