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소주잔을 함께 기울여 주지 못한 나
남편의 기억 속에 나는 30년 전의 나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변한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 걸까!
남편과 나는 대학 시절 5년을 사귀고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 7년을 함께 살다가 직장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20년을 주말부부로 살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정신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 자녀들이 지금은 각자의 일을 찾아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제 몫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주말 부부로 뜨문뜨문 보며 살다가 퇴직하고 함께 생활한 지 7년째이다.
퇴직하고 3년은 시아버지 병간호 한다고 병원과 시댁을 왔다 갔다 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홀로 남으신 어머니댁에 왔다 갔다 하면서 어머니와 식사도 하고 집안일도 거들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남편이다.
그런 남편이 요즘은 스스로도 지친 건지, 짜증도 잦고 자꾸만 시비가 생긴다.
남에게 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 하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남편에게 별말 없이 그냥 묵묵히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 남편은 내가 많이 못마땅한 듯하다.
"그렇게 책도 읽고 공부도 하는데 말은 그렇게 밖에 못해! 공부는 왜 하는가!"
"교회 권사면서 그렇게 말하면 된가!"
"내가 가정부를 너무 오래 한 것 같네. 빨리 집을 떠나야지!"
이런 말들로 나에게 상처 아닌 상처를 준다.
내가 당신한테 집안일을 시킨 것도 아니고, 어머니를 모시라고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알아서 선택한 일이면서 요즘은 거의 매일이 술이다.
매일 저녁마다 어머니 집에 다녀와서는 밥대신 소주를 마신다.
거의 매일 마시는 소주잔에 매일의 한숨과 고단함을 털어내는 남편의 모습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어떨 때는 안쓰럽다가도 어떨 때는 꼴 보기 싫고, 어떨 때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그렇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며칠 전에 술 마시면서 남편은 나에게 30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첫아이를 출산하고 아들턱을 내고 다니면서 집에 까지 사람들을 데려와서 술 마셔도 내가 다 받아주고 들어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직장에서 본인이 장가를 제일 잘 갔다고 후배들이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잘 들어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대모였다는 것이다.
그때는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내가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시댁이 전부였다. 착한 며느리, 착한 아내, 좋은 엄마가 전부였다. 그렇게 사는 것이 평범한 행복이고 소소한 재미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다들 열심히 각자의 길을 찾아 살아내고 있었다.
엄마로서 세 아이들이 대학입학까지 마치고 나니 허무했다. 남편의 이른 퇴직은 더 충격이었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노래가사도 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누군가와 함께라는 것은 외로움만 더 깊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영혼의 독립을 선언하고 배움에 정진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무엇인가에 집중을 하고 목표를 향해 나가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남편을, 자녀들을 공간을 두고 보게 된 것이다. 나와 그들 사이의 공간을 본 순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요즘 남편이 자꾸만 그 평화를 흔들어 댄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한창 일할 나이에 일을 포기하고 부모님을 선택한 남편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런 남편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부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매일매일 마시는 소주잔을 함께 기울여 주지 못한 것?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
나 라도 건강해야 오래 동안 일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70이 넘어서도 출사를 다니시는 은사님을 보면서 아직도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나는 한 시간이 아깝다. 뭐라도 배우고 생산적인 일을 해보려고 노력할 시간이 20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니 할 일이 너무 많다. 아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잘 살아낼 것이고, 자녀에게 짐이 되는 부모는 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일하는 내가 너무 기쁘고, 꿈이 있는 내가 감사하다.
남편의 마음에도 자식이, 부모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부가 되지는 못할 망정 서로 원망하는 사이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틀 뒤면 결혼 31주년이다. 작년이 30주년이었는데 아들 결혼식이 있어서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다.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는데 어제 다툼으로 올해 결혼기념일도 그냥 넘어갈 것 같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소주잔을 좀 더 큰 잔으로 준비해야 할까! 농담이다. 어떻게 하면 술을 안 마시고 대화라는 것을 할 수 있을지가 나의 숙제 아닌 숙제다. 당신이 30년 전에 알았던 당신의 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주면 좋겠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나니 나는 이렇게 홀가분한데 남편은 힘든가 보다.
여보 미안해요. 당신도 당신 안의 당신을 하루빨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