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을 차단하지 말고 감수해라
나는 전문성이 부족한 특수교사였다.
개인적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협력이 필요했다.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책을 펼치며 내 눈에 들어온 문장이다. 마음에 일침을 주는 말이다.
협력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다. 안되면 그냥 포기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그들의 불편을 외면했다.
나는 특수교사는 아니다. 평생교육사로 장애인 평생교육원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배움의 현장에 있다.
2년 남짓 생활하면서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도저히 장애라 명명된 학습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이다. 다름을 인정할 뿐 그들과 하나 되지 못함을 탓하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궁리만 하는 소심한 사람이 나인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 선생에 따르면, 우리말의 '앎'은 '앓음'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바로 알이다. 무언가 안다는 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고야 가능하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은 앓는 과정으로서, 불편을 차단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p149
불편을 차단하거나 피하지 말라고 하는데, 불편을 감수하라고 하는데 힘든 일이다. 알을 깨고 인고의 시간을 인내한다는 것이 나 혼자서 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일까.
장애인평생교육원에서 평생교육사로서 역할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경험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공감하며 함께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사람의 불편함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이를 감수하며 나아가는 일이되어야 한다. 장애인 교육현장에서 평생교육사는 장애인을 단순히 가르치는 대상이 아닌,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이 구체화되어 갈수록 자신감은 약해진다.
우리반 학습자들이 생각났다.
<누구를 위해 약물은 존재하는가> 마지막 8장에서 다루는 부분이다. 약물을 권하는 학교나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의 글 속에서 스스로를 향한 질타를 해 본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지, 한번도 입밖으로 내 뱉어 보지 않은 자신을 향한 질타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정신과 약을 먹는 그들에게서 내 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나약함에 화가 났다. 수업시간이면 조는 것이 다반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인 상담을 핑계로 병원이나 상담소를 간다. 약물은 그들의 증세를 일시적으로 소거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그러한 증세를 가지고 어떻게 타인과 함께 부딪히며 살아갈 것 인가에 대한 삶의 지혜나 방법을 얻을 기회는 줄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하며 괴리감에 머리가 아프다. 이렇게 또 2학기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이런 모순의 시대에 발달장애라 명명된 학생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교사라면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불편함을 쉽사리 정신의학 전문가에게 떠넘기거나 항정신병 약물을 통해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가두거나 분리할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을 통해 함께 아파하며
새로운 지혜와 궁리를 얻고자 노력할 것인가?' 발달장애라 명명된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며 일상을 살아가는 특수 교사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