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산 와인의 눈물 (1)

빈티지(Vintage)와 빈티(Poverty)

by 괴도신사



1.


오후 2시 10분. 광화문 S-매거진 편집국 비상구 계단. 나는 쭈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3층과 4층 사이,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구석진 공간이었다. 벽에는 ‘금연’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바닥에는 누군가 비벼 끈 담배꽁초들이 짓이겨져 있었다. 매캐한 니코틴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로 들어왔다. 내 처지와 딱 어울리는 냄새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휴대폰에 대고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상대방은 보이지도 않는데, 내 척추는 생존 본능에 따라 비굴한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작가님, 제가 그날……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정말 멍청하게도…… 녹음기 버튼을 누르는 걸 깜빡했습니다. 수첩에 적은 내용도 복기가 안 될 만큼 정신이 나가 있었나 봅니다.”

수화기 너머는 조용했다. 차라리 욕이라도 퍼부어주면 좋으련만. 그 침묵이 내 숨통을 서서히 조여왔다. 침묵은 욕설보다 더 무거운 비난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편집장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데, 인터뷰 내용이 전무해서……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딱 30분만, 아니 10분만 다시 시간을 내주신다면 제가 작가님 계신 곳으로 지금 당장 날아가겠습니다.”

이것은 읍소라기보다 구걸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아침 편집 회의 때 김 부장이 내 책상을 볼펜으로 딱, 딱 두드리며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박민서, 이번 차이헌 인터뷰 펑크 나면 네 책상은 복도로 나가는 거야. 알지? 요즘 잡지 업계 불황인 거. 인원 감축 1순위가 누굴까?’ 나는 내 책상이, 내 유일한 밥벌이 수단이 복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밀려나는 상상을 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존심? 그런 건 월급날 스치듯 지나가는 통장 잔고 같은 거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살아야 하는 것.

“박 기자님.”

한참 만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조하고 서늘한, 특유의 저음이었다. 마치 잘 벼린 수술용 메스가 고막을 스치는 것 같았다.

“기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팩트 체크요?” “아니요. 기록입니다.”

그는 단호했다.

“사건은 휘발됩니다. 아무리 충격적인 진실도 기록되지 않으면 증발하죠. 기자님은 그날 제 시간을 증발시켰습니다. 셰프의 거짓말을 잡느라 쓴 내 에너지, 당신에게 할애한 내 호의, 그리고 그 공간에서의 긴장감까지 전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프로답지 못했습니다.” “사과는 됐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사각, 사각 들려왔다. 그 규칙적인 소리가 내 심박수보다 느긋하게 느껴졌다.

“오후 3시에 경매가 있습니다.” “경매요?” “서울 옥션 강남센터. 3시까지 오시면 동행 취재는 허락하죠. 단, 인터뷰를 위한 별도의 시간은 없습니다. 이동하는 틈틈이, 그리고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제 옆에서 알아서 적으십시오.”

알아서 적으라니. 받아쓰기 시험도 아니고.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동아줄이 내려왔으면 잡아야 했다.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늦으면 문은 닫힙니다. 저는 기다리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특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에게는.”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액정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2시 15분. 편집국은 광화문. 목적지는 신사동 도산대로. 평일 오후,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강남까지 45분 안에 가야 한다. 대중교통으로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지하철 환승 시간, 도보 이동 시간을 합치면 최소 50분은 걸린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비상구 문을 박차고 나가며 택시 호출 앱을 켰다. 목적지 입력: 서울 옥션 강남센터. ‘예상 요금 18,500원.’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1만 8천 원. 내 3일 치 점심값이다. 오늘 점심을 3,500원짜리 구내식당 라면으로 때운 이유가 뭐였더라. 카드값 결제일이 사흘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늦어서 인터뷰를 놓치면 1만 8천 원이 아니라 월급 전체가 날아간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호출하기’ 버튼을 눌렀다. 이번 달 생활비가 도로 위에 아스팔트처럼 깔리는 소리가 들렸다.


2.


택시는 강변북로를 질주했다. 차창 밖으로 한강의 윤슬이 반짝거렸다. 가을 햇살을 받은 강물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평소라면 넋을 놓고 바라봤을 풍경이지만, 지금은 그 반짝임조차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저렇게 평화로운데, 나만 시속 80km로 달리는 철제 상자 안에 갇혀 초조함과 싸우고 있었다.

“기사님, 죄송한데 조금만 더 빨리 가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3시까지 꼭 가야 해서요.” “아이고, 손님. 저도 밟고는 있는데 이 시간이 원래 좀 막혀요. 신사역 사거리가 헬이라니까.”

기사님은 백미러로 나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 라디오에서는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쾌한 리듬이 내 불안한 심장 박동과 엇박자를 냈다. 나는 미터기를 쳐다보았다. 말이 달리는 그림이 미친 듯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숫자가 올라갔다. 12,000원…… 13,000원…… 14,000원. 숫자가 바뀔 때마다 내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저 돈이면 편의점 도시락이 네 개다. 김밥이 여섯 줄이다. 나는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호대교를 건너자 풍경이 바뀌었다. 강북의 회색빛 빌딩 숲이 멀어지고, 강남의 세련된 스카이라인이 다가왔다. 압구정을 지나 도산대로로 접어들자, 거리는 온통 명품의 전시장으로 변했다. 페라리, 포르쉐, 람보르기니 매장들이 줄지어 있었고, 보도블록 위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조차 달랐다. 이곳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자본주의의 가장 화려한 정점. 욕망이 투명하게 전시되는 도시. 내 낡은 트렌치코트와 굽 닳은 로퍼가, 이 거리에 섞일 수 없는 이물질처럼 느껴졌다.

“도착했습니다.”

택시가 멈춰 섰다. 오후 2시 52분. 기적적인 세이브였다. 나는 카드를 내밀고 영수증을 챙길 새도 없이 차 문을 열었다. 바람이 훅 끼쳐왔다.

서울 옥션 강남센터. 건물은 청담동의 레스토랑과는 또 다른 종류의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라 뤼미에르’가 폐쇄적이고 은밀한 요새였다면, 이곳은 욕망을 사방으로 발산하는 거대한 쇼윈도였다. 전면이 통유리로 마감된 건물 외벽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거렸고, 그 유리벽 안쪽으로는 수십억을 호가한다는 현대 미술 작품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보석 상자 같았다.

입구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의 귀에 꽂힌 투명한 인이어 이어폰 줄이 스프링처럼 꼬여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게 아니라,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걸러내는 필터처럼 보였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지하철 계단을 뛰어오르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기고, 트렌치코트의 구겨진 자락을 펴보려 애썼다. 하지만 싸구려 합성섬유의 주름은 내 인생의 주름처럼 쉽게 펴지지 않았다. 가방 끈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들어가자. 쫄지 마, 박민서. 너는 취재하러 온 거야. 도둑질하러 온 게 아니라고.

“초대장 확인 부탁드립니다.”

내가 다가가자 경호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앞을 막아섰다. 그의 시선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내 낡은 가방, 그리고 흙이 묻은 운동화 굽을 훑었다. 0.5초.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시선 속에 담긴 의미를 읽었다. ‘여긴 당신이 올 곳이 아닌데.’

“아, 저는 초대장은 없고요. 차이헌 작가님 일행입니다. 박민서 기자라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경호원은 내 말을 자르고 무전기에 대고 뭐라 중얼거렸다. “입구입니다. 박민서 씨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는 나를 다시 쳐다봤다.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아니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뀐 것 같기도 했다.

“확인되셨습니다. 지하 2층 경매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자동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묘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것은 종이 냄새였다. 아주 오래된 고서(古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쿰쿰하고 묵직한 종이 냄새. 거기에 씁쓸한 먼지 냄새와, 낯선 사람들의 짙은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돈 냄새’라고 정의했다. 빳빳한 신권 지폐 냄새가 아니라, 오랫동안 금고 속에 잠들어 있던 묵은 돈의 냄새. 역사가 된 자본의 냄새.

나는 대리석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또각, 또각. 내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렸다. 벽면에는 이번 경매에 출품된 와인들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로마네 꽁띠,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와인을 모르는 나도 이름은 들어본 전설적인 술들이 붉은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진 밑에 적힌 ‘추정가’의 숫자들은 비현실적이었다. 0의 개수가 너무 많아서, 언뜻 보면 통신사 고객센터 전화번호처럼 보였다. 저 숫자 하나가 내 연봉이고, 내 전세금이고, 내 미래였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내 인생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3.


지하 2층 로비. 붉은 벨벳 커튼으로 장식된 입구가 나타났다. 직원이 무거운 커튼을 양쪽으로 걷어주었다. 마치 연극 무대가 열리는 것 같았다. 그 안은 별세계였다. 수십 개의 원형 테이블이 호텔 연회장처럼 배치되어 있었고, 테이블마다 번호가 적힌 패들(Paddle)이 꽃처럼 꽂혀 있었다. 천장에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는데, 그 빛이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내려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백발을 포마드로 정갈하게 넘긴 노신사는 돋보기를 끼고 카탈로그를 정독하고 있었고, 밍크 숄을 두른 중년 여성은 옆자리의 지인과 귓속말을 나누며 우아하게 웃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다리를 꼬고 앉은 30대 남자는 지루하다는 듯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여유였다. 그들은 이곳의 높은 천장과 화려한 조명, 그리고 비싼 물건들에 주눅 들지 않았다. 마치 안방 거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누군가는 볼펜을 돌리고, 누군가는 하품을 했다. 그들에게 이곳은 치열한 전투 현장이 아니라, 오후의 나른한 쇼핑 장소일 뿐이었다. 내가 마트 전단지를 보며 계란 한 판 가격을 비교할 때, 그들은 카탈로그를 보며 1억짜리 와인을 고른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이렇게 완벽하게 분리된 중력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이헌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맨 앞줄, 가장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빈 의자뿐이었다. 아무도 그의 옆에 앉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은 그가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거나. 고립되어 있었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고립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오늘도 완벽했다. 차콜 그레이 색상의 쓰리피스 수트. 재킷의 라펠은 날렵했고, 행거치프는 넥타이 색깔과 톤온톤(Tone on Tone)으로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카탈로그를 넘기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넘기는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권태로워 보였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지루함을 혼자 짊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소리를 죽이려 애썼지만, 카펫 위를 밟는 내 운동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인기척을 내며 다가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저, 작가님.”

내가 불렀다. 그는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앉으시죠.”

그가 시선은 여전히 카탈로그에 고정한 채 말했다.

“정확히 2시 58분이군요. 2분 남았습니다.” “……택시 기사님이 거의 카레이서 수준이셨거든요. 목숨 걸고 왔습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냈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 쳐다봤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산 탄산수 한 병과 와인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차가운 유리병.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감동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숨 고르십시오. 질문은 호흡이 정리된 뒤에 받겠습니다. 헐떡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진 않군요.”

그는 탄산수를 따르지도, 권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잔을 들어 입술만 축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이 탔지만, 내 몫의 물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 경매, 와인인가요?” “그냥 와인이 아닙니다. ‘투자 가치가 있는’ 와인이죠.”

그가 카탈로그를 덮어 테이블 위로 미끄러뜨렸다. 표지에는 **[Fine & Rare Wine Auction: The Memory of Time]**이라는 금박 문구가 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 산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의 절반은 마시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소유하려고 사죠. 혹은, 과시하려고.”

그는 턱짓으로 뒤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옆자리의 비서에게 큰 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손목에 찬 금시계가 번쩍거렸다. 목소리가 컸다. "야, 이거 무조건 잡아.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까."

“와인은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거든요.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지만, 로마네 꽁띠는 병을 깨뜨리지 않는 이상 가격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금도 안 내죠. 이보다 완벽한 탈세…… 아니, 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경멸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하는 방법 같았다.

“작가님은요? 마시려고 오신 건가요? 아니면 투자하러?” “둘 다 아닙니다. 저는 오늘 심판관으로 왔습니다.” “심판관이요?”

그때, 장내 안내 방송이 울렸다.

[잠시 후 3시부터 11월 프리미엄 와인 경매가 시작됩니다. 참여자분들께서는 자리에 착석해 주시고, 휴대폰은 진동으로 전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잦아들었다.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그 긴장된 정적처럼. 무대 위로 핀 조명 하나가 떨어졌다. 단상에 선 경매사가 하얀 면장갑을 끼고 나무망치를 들었다.

“자, 오늘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로트(Lot). 프랑스 부르고뉴의 자존심, 앙리 자이에(Henri Jayer) 크로 파랑투 1999년산입니다. 시작가 2,500만 원부터 갑니다.”

2,500만 원. 내 연봉에 육박하는 금액이 ‘시작가’였다.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곳에서는 돈의 단위가 내가 아는 현실 세계와 다르게 적용되는 모양이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100원이 모자라 버스를 못 타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100만 원 단위가 껌값처럼 오르내린다.

차이헌은 무대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탄산수 잔의 기포를 바라보았다.

“박 기자님. 빈티지(Vintage)라는 단어의 뜻을 아십니까?” “……수확 연도 아닌가요? 와인 포도를 딴 해.” “사전적 의미는 그렇죠. 하지만 이곳에서의 의미는 다릅니다.”

그는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투명한 기포가 소용돌이치며 올라왔다.

“빈티지는 ‘시간’에 값을 매기는 행위입니다. 1982년의 보르도에 내리쬐던 햇살, 1990년의 부르고뉴에 내리던 비, 2005년의 바람. 지나가 버려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병 속에 가두고, 거기에 가격표를 붙이는 거죠.”

“낭만적이네요.” “낭만? 글쎄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걸 박제(剝製)라고 부릅니다. 죽은 시간을 미라처럼 만들어서, 비싼 값에 팔아먹는 장사. 생명을 잃은 껍데기에 환상을 부여하는 일이죠.”

그의 시선이 내 낡은 가방 끈에 머물렀다. 인조 가죽이 해져서 하얀 실밥이 터져 나온 부분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가방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빈티지(Vintage)와 빈티(Poverty)는 한 글자 차이라는 겁니다. 이곳에선 그 한 글자 차이로 사람의 등급이 나뉩니다. 기자님처럼.”

뼈가 있는 농담. 아니, 팩트 폭행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2,500만 원짜리 와인이 오가는 이곳에서, 18,500원짜리 택시비에 벌벌 떨며 달려온 내 존재는 정말로 ‘빈티’ 그 자체였으니까.

“작가님은 빈티지 쪽이시고요?” “글쎄요. 저는 그저 썩은 냄새를 잘 맡는 청소부에 가깝습니다.”

그때, 경매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억! 2억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장내가 술렁거렸다. 로트 번호 15번. 샤토 페트뤼스(Petrus)가 등장한 것이다. 낙찰을 외친 건 아까 차이헌이 가리켰던 그 젊은 남자였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웃고 있었다.

“저 사람이군요.”

차이헌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득였다.

“오늘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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