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노태우는 9사단장이었다.
얼마 전 올린 <서울의 봄> 관련 콘텐츠가 핫해서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저는 당시 반란군 핵심 부대였던 경비단 전역자이기에 이 영화가 보다 더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시다 보면, 전두환을 포함한 반란군이 왜 많고 많은 부대 중에 수도경비사령부의 경비단을 진지로 활용해서 움직였을까? 라는 생각 안 드셨나요?
심지어 전두환은 반란 당시 보안사령부의 사령관이었고, 노태우는 9사단 사단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경비단은커녕 수도경비사령부와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요. 이들이 왜 경비단을 반란군 진지로 사용했는지, 제가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강력한 전투력입니다. 경비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 때 서울로 들어온 30사단과 33사단의 후신입니다. 이 두 사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을 지키는 근위부대로 역할이 바뀌는데요.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후에도 대통령을 지키는 친위대다 보니, 일반 병사의 선발과정도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이건 제가 복무하던 시절도 마찬가지였는데, 90년대까지만 해도 키가 180미만이거나 안경을 쓰면 무조건 탈락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 키도180cm가 넘습니다. 그 외에도 선발과정에서 신원 조회를 하거나 신체검사를 깐깐하게 해서 중도에 탈락하거나 포기하는 동기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서울 한가운데, 대통령 가까이에서 실탄을 들고 근무하는 업무 특성상 지,덕,체 중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는 부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방위사령부 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부대 중 하나로 지금도 꼽히고 있고, 당시에는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강력한 전투력이 있었기에 반란군의 핵심 부대로 선정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을 하기 전에 경비단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1967년부터 69년도까지 당시 대대급이었던 30경비대의 대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전두환이 경비대 대대장이던 68년도에 북한의 남파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몰래 들어옵니다. 이 사건을 1.21사태 혹은 김신조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때 경비대는 교전뿐만 아니라 전두환의 지시로 밤중에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남파공작원들을 소탕하는 데 공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입장에서는 본인이 지휘관이었던 부대인 만큼, 서울 시내에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비단을 반란군의 진지로 쓰는 것에 보다 안심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경비단이 반란군 진지로 쓰인 이유 중 세번 째는 우선 부대의 위치입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반란군은 당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아야 했는데요. 대통령은 청와대에 보통 계시겠죠? 그런데 이 청와대 외곽을 지키는 부대가 바로 경비단입니다. 특히, 30경비단은 당시에 경복궁 옆에 위치해 있어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위치였기에 반란군이 동선을 최소화할 수 있는 부대로 적합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경비단은 청와대를 지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상관인 수도경비사령관도 무장한 상태로 방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의 눈을 피하기에도 적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영화 <서울의 봄>을 보시다가 생길 수 있는 궁금점, 반란군은 왜 경비단을 진지로 썼을까?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그리고 제 추리는 어떠신가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기회가 되면 경비단 전역자로서 <서울의 봄>을 보신 후에 즐길 수 있는 TMI들을 풀어보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더 알고 싶은 점, 영화를 보시고 느낀 점을 댓글로 남겨주신다면 다음 콘텐츠를 만들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