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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 Oct 19. 2019

원자재 소싱 담당자, 긴 안목이 필요하다.

CPSM이 알려주는 구매 부서 적응 비법(10)


벌써 목요일이다. 오늘은 퇴근 시간 무렵까지 긴 회의가 있었다. 경영기획팀이 원부자재 보유재고에 대한 감축방안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재고에 관한 경영기획팀 의견은, 구매팀이 보는 시각과 서로 다르다. 경영기획팀은 가급적 회사 전체 재고를 줄이려고 하지만, 구매팀은 불요불급한 재고는 안고 가자는 입장이다. 원자재 재고가 하나도 없어서 생산이 멈추게 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경영기획팀은 시스템(예를 들어 JIT)으로 해결하자고 유혹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당장 재고가 바닥나 생산 일정이 삐긋덕 거리면, 구매팀으로 모든 화살이 날아올 게 뻔한 데 말이다. 당연히 쉽게 끝날 회의 주제가 아니다. 오늘도 역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사무실에 돌아와 서둘러 책상을 정리했다. 개인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임이 오늘 저녁에 약속되어 있다. '구매인 아카데미'라는 구매업무 종사자들의 모임이다. 분기에 한 번씩 만나 구매와 관련된 여러 얘기를 나누는 자리다. 특히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구매 개선에 관한 자기 경험이나 생각을 직접 강의하기도 한다. 최근에 K도 내가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K 역시 오늘 모임에 참석하는 걸로 나와 약속이 되어 있다.    


오늘 강연자는 L사의 자재팀장이다. 주제는 ABC 관리기법을 통한 적정재고 관리 방안이란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요즘 회사에서 재고관리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내가 오늘 모임에 꼭 참석하고자 했던 이유도 강연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발표자의 열띤 강의와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이 2시간 넘게 이어졌다. 강연 도중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K가 보이지 않는다. 모임이 끝날 때쯤에야 K가 비로소 모습을 나타냈다.    


“왜? 늦게 왔어요. 일이 많아요?”

“네. 팀장님. 오늘 업무분장이 확정 됐거든요.”

“그래요. 그러면 보직이 뭐예요?”

“원자재 소싱이요.”

“신입이라 개발 소싱은 아닐 거고, 양산 소싱이겠네요?”

“맞아요. 잘 아시네요. 팀장님.”

“야~ 그래도 상당히 비중이 있는 업무인데”

“그건 아니고요. 일단은 비교적 단순한 아이템만 제가 맡기로 했어요. 팀장님, 그런데 원자재 소싱 담당자는 미리미리 챙겨야 할 게 많아서 엄청 부지런해야 한다는데, 너무나 당연한 애기 아닌가요?”

“누가 그래요?”

“저희 파트장이요. 그러면서 담당자는 '적어도 3개월 이상을 내다봐야 한다. 단순히 오늘내일만 생각하다가는 너 큰 코 다친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K와 대화 도중, 갑자기 필자가 예전의 회사에 근무했을 당시, 담당 과장님이 늘 인용하신 《노자》의 구절이 떠올랐다.    


어려운 일은 그것이 아직 쉬울 때에 처리하고,

큰일은 그것이 아직 미세할 때에 해결하라.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부터 일어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구매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와 자세가 담겨있다고, 당시 과장님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매번 강조하셨던 글귀다. 그때 필자는 양산용 원자재 소싱(Sourcing)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무리 사소한 일도 미리 챙기지 않으면 나중에는 본인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구매담당자는 미리미리 챙겨야 한다. 구매담당자 입장에서 구매 수량을 검토하거나 공급일정 수립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리를 하게 되고, 무리를 하게 되면 위험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파트장도 K에게 그런 부분을 강조했을 것이다. 내가 K에게 좀 더 설명을 해 주어야겠다.    


“제조업은 원래 생산계획이 자주 바뀌어요? 생산계획이 바뀌면 원자재 수급계획도 바뀌잖아요. 그걸 미리미리 챙기란 의미죠.”

“아니, 구매에서 생산계획을 바꾸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게 원래 자기들이 할 일이고.”

“그런 뜻이 아니라, 생산팀은 생산계획 바뀔 때마다 인원 배치, 공정능력, 설비 가동 등 챙겨야 할 게 너무 많다 보니, 원자재 수급에는 신경 쓸 여력이 많지 않으니까 구매가 챙길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요, 팀장님. 생산에서 필요한 원자재를 넣어달라고 할 때 넣어주면 되는 거잖아요.”

“물론 K 말처럼 당장 공급이 가능한 원자재는 상관이 없어요. 극단적으로 오늘 생산에서 구매요청을 하고 내일까지 넣어달라고 해도 공급해주면 되니까. 문제는 조달기간(Delivery)이 긴(Long Term) 원자재들이에요."

"아~ 그래서 파트장님이 특히 장납기 원자재를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던 거군요"

"장납기 원자재? 조달기간이 긴 원자재에 대해 K 회사는 그런 용어를 쓰나 보죠. 그거 괜찮네요. 아무튼 원료나 수입자재가 그런 장납기 자재들의 대표적인 사례예요. 변수가 워낙 많거든요. 이런 원자재는 미리미리 챙겨 놓지 않으면 나중에 구매팀만 죽어나요."

"원료는 제조하는데 그리고 수입자재는 운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런 건가요?"

"이제 좀 이해를 하네. 물론 다른 이유도 많아요. 그건 기본이고. 그런데 생산팀은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생산계획은 자주 바뀌고. 어떨 때는 오늘 구매를 하고 내일까지 원자재를 넣어달라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구매팀 소싱 담당자만 힘들게 된다는 말이네요."    



구매팀만 죽어난다든지 아니면 소싱 담당자만 힘들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미리 챙기지 않아서 발생되는 모든 책임을 구매팀이 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원자재가 제 때 들어오지 않으면 생산라인이 멈춰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다. 또한 시간에 쫓겨서 겨우 원자재를 구매했다고 하자. 구입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아지거나, 품질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 생각해 봅시다. 지난번 잠깐 얘기했던 김밥 제조 기억나요?”

“아~ 원부자재와 시설재(MRO)가 무엇인지 설명하실 때 말씀하셨던 거요.”

“맞아요. 그때 김밥에 들어가는 원료 즉 원자재가 뭐였지요?”

“쌀, 김, 소시지, 계란 그리고 또 뭐였더라? 아! 시금치요.”

“그래요. 그러면 내가 김밥을 생산하는 생산팀 담당자이고, K는 원자재를 공급하는 소싱 담당자라고 합시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포장 김밥을 전문으로 하는 국내 최대 제조업체고.”

“네. 팀장님은 생산팀, 저는 구매팀”

“내가 K에게 하반기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구매요청을 3월 말에 했어요. 최소한 3개월 전에는 해야 하니까.”

“납기는요?”

“당연히 6월 말이 되겠지요.”

“그러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요. 기존 거래체인 협력사를 통해서 공급받으면 되지 않나요?”

“그런데 6월 초부터 갑자기 전국에 조류인풀루앤자(AI)가 발병해 계란 공급이 불가능해져요. 그러면 어떡하죠?”

“대체품을 찾아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대체품을 찾든가 아니면 대체업체를 찾든가?”

“대체품이야 계란 아니면 다른 재료를 쓰면 되지만, 대체업체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나요? 조류인플루엔자가 전국에 퍼졌는데”

“수입을 하면 되지요. 항공편으로,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구입단가는 높아지겠지만. 그리고 착각하기 쉬운 게 하나 있는데, 대체품도 어차피 업체가 하는 거잖아요. 수입도 마찬가지고. 결국 모두 공급업체가 하는 거예요.”

“아, 듣고 보니 팀장님 말씀이 많네요.”

“문제는 대체품이든 수입품이든 조달기간이 늘어난다는 거예요. 신규 업체를 발굴하고 수입통관 절차에 물리적으로 소요되는 시간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런 경우도 구매팀 책임인가요?”

“전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공급이 안정화될 때까지는 자유롭지 못하지 않겠어요.”    


위와 같은 상황은 생산팀 원자재 구매 시, 제조업 구매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물론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위험은 늘 그렇게 예고 없이 다가온다. 원래 구매가 그렇다. 하지만 구매담당자는 이러한 위기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 해 두고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구매 이슈가 없다고 마냥 넋을 놓고 있는 구매팀이 있다면, 그 조직은 위험이 발생했을 때 정말 대책이 없다. 구매담당자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난세를 대비할 줄 아는 거시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구매담당자의 능력과 실력도 그런 과정 속에서 길러진다. 그래서 제대로 된 구매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대체업체 발굴도 그러한 준비 중의 하나이다. 구매 위험 방지를 위한 대체업체 발굴은 구매팀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과제다. 장기적으로 기존 업체만으로는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기존 업체의 불가항력적인 사유로 인한, 자재구매의 지연이나 단절은 치명적이다. 생각해 보자. 계란 구매가 불가능한 경우, 사전에 대체품을 공급할 업체 즉 대체업체를 구매팀이 미리 준비해 놓지 않는다면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시간이 있을 때 미리미리 대체업체 확보에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내부 저항(?)도 만만치가 않다. 기존 업체와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산, 개발, 품질부서 등 모두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기존 업체의 돌발변수를 사전에 예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매는 다르다. 업체 관리는 바로 구매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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