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다.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원하는 곳에서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새로운 근무제도를 말한다. 이는 코로나19로 재택이나 원격근무가 늘면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워케이션'에서 착안해 '볼런케이션'이라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봉사(Volunteer)와 휴가(Vacation)의 합성어다.
연말이 되면 회사는 직원들의 남은 연차를 수당으로 지급한다. 명절이나 연휴 때 권장휴가를 쓰도록 인사팀에서 지속적으로 안내를 하지만 연차를 다 쓰는 직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직장인에게 휴가는 너무 소중하다. 최대한 계획적으로 알차게 써야만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업무로 일정 잡기가 쉽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직까지 눈치 안 보고 휴가 가는 게 쉽지 않은 분위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남은 연차 수당은 회사 입장에서도 부담이다.
회사로서는 연차를 소진해서 좋고 직원들은 휴가 계획을 대신 세워줘서 좋은 '볼런케이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아무리 포장해봐도 회사에서 주최하는 활동에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리는 만무했다. 최대 40명씩 3차수를 목표로 했지만 참여인원이 부족해 30여명씩 2차수만 진행되었다.
휴가라는 느낌을 내기 위해 강원도로 지역을 좁혔고 누구나 부담 없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농활로 가닥을 잡았다.
우선 일손이 필요한 농가를 찾기 위해 강원도청과 강원도자원봉사센터에 문의를 했다.
많은 농촌이 기계화되어 예전처럼 대규모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고 농사일을 처음 해보는 봉사자들이 오히려 농사를 망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깔끔한 정원이 있는 현대식 가옥에 반짝반짝하는 외제차가 서있거나 부농 같은 느낌이 나서도 안된다.
하지만 농촌의 인건비가 크게 올라 외국인 노동자 구하기도 쉽지 않고 농번기에 많이 힘들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분명히 우리의 도움이 간절한 곳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로컬 여행사 등 다방면으로 연락해보았다.
착한 여행이라는 공정여행사를 통해 농활과 숙소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농촌체험마을 쪽으로 연결이 될 수 있었다. 춘천과 인제로 후보지를 좁히고 답사를 갔다. 군에 입대하던 시절 인제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로 유명했던 인제였는데 고속도로가 좋아져서 이제 서울에서 2시간 30분이 조금 더 걸릴 정도로 가까워졌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도착한 곳은 하추리 농촌마을이라는 곳이었다. 평온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2022년 대통령상 수상이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다양한 아이디어로 비대면 활동을 계속 이어간 결과라고 했다. 서울에서 광고회사를 다니다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이곳에 왔다가 귀촌하게 되셨다는 사무국장님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숙소도 아주 깨끗했고 가마솥 체험과 바비큐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식당도 나쁘지 않았다. 이쁜 카페와 별을 보며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아담한 공간도 있었다. 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우리가 일할 조와 수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서울에서 더 가까워 좀 더 선정될 확률이 높았던 춘천은 그에 비해 너무 준비가 안된 상황이었다.
코로나 이후 체험마을 운영을 못했고 아직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숙소도 지저분했고 밭을 정리하는 일만 가능해서 일거리도 마땅치 않았다.
잡곡과 콩, 팥, 옥수수, 오미자, 블루베리, 벌꿀 등 하추리 주민들이 기른 재료로 만드는 '카페 하추리'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취소자가 한두 명씩 늘어갔다. 봉사활동을 신청했다가 중간에 취소했다고 특별히 페널티를 줄 수 있는 건 없다. 벌금을 내거나 다음에 참여를 못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늘 아쉬운 건 회사 측이다.
기본적으로 봉사활동은 무급이다. 개인의 시간을 내어 참여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 그저 불가피한 사정이 생긴 것이라 믿는 방법밖에는.
동료나 후배와 같이 신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혼자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참 기특하고 대견한 사람들이다. 입사 100일된 파릇파릇한 신입사원부터 50대 중반의 어르신(?)까지 참가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했다.
아침 8시 회사에 모여 단체버스로 출발했다. 휴가를 내어 온만큼 회사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패키지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힐링하는 시간 되시라고 안내드렸다.
길게 늘어진게 조, 약간 붉은 빛을 띠며 곧게 뻗은게 수수
마을 영농조합 공장장님께서 오늘의 작업을 설명해주셨다
봉사자들이 안 보일 정도로 키가 큰 수수와 조들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버스를 타고 10분 이동하여 조와 수수가 있는 밭에 도착했다.
사람 키만큼 자란 조와 수수의 머리를 전지가위로 잘라서 마대자루에 담는 작업이었다.
작업은 간단했지만 이리저리 휘어져있는 조와 수수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날씨도 좋고 넓은 밭에서 잡곡을 수확하고 있으니 자연이 주는 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20분 정도 힐링이었다면 그 후로 3시간은 노동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땀 흘리며 일하는 뿌듯함 속에 중간에 떡과 오미자차로 재충전하여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22명의 봉사자가 90포대를 넘게 수확했다. 어르신 내외는 둘이 했으면 일주일도 더 걸릴 일을 반나절만에 끝냈다고 기뻐하셨고 그것을 보는 우리는 더 기뻤다. 이것이 자원봉사의 힘이고 긍정의 에너지라는 것이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22명이 3시간만에 거둔 양이 이 정도!!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아름다웠다개운하게 씻고 가마솥 체험을 하기 위해 조별로 모였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40분을 기다리는 여유로운 시간이 좋았다. 밥이 다되어 갈 때쯤 바비큐를 굽기 시작했다. 다들 맥주 한잔과 함께 시장한 배를 채웠다.
식사 후에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불멍의 시간을 가졌다. 얼마 만에 해보는 캠프파이어인지 마음속에 먼지 모를 그리움이 모닥불과 같이 타올랐다.
쉼과 힐링이라는 컨셉에 따라 별다른 진행은 하지 않았다. 그저 봉사자들과 감자를 익히며 불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군가 한마디 할 때마다 별거 아닌데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2시간 정도 불 앞에 있다가 하나둘 숙소로 흩어졌다. 까만 밤하늘과 고요함이 평화로웠다.
평화와 힐링 그 자체였던 캠프파이어 시간시골에서 맞는 상쾌한 아침. 밭에서 방금 올라온듯한 싱싱한 반찬이 너무 맛있고 기분 좋게 했다.
드디어 짐을 싸서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하얗고 길게 뻗은 매끈한 나무가 기대되었다. 숲 해설사의 귀에 쏙쏙 박히는 환경보호 강의가 아름다운 자연과 버무려져 풍성함을 더해주었다.
그래 이젠 정말 모두 함께 환경을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전직 모델 출신의 멋쟁이 숲해설사님의 인솔
아싸~호랑나비~한마리가~
정상에서 자작나무를 감상하는 시간
가을에도 이쁘지만 눈내린 겨울이 진짜 멋지다고 한다이미 정오를 향해 가고 있는 시간이라 내려오는 길은 더웠다. 쉬지 않고 1시간 정도 계속 걸어서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다. 막국수에 메밀전병과 수육을 시켰다. 막걸리를 원하는 봉사자들이 있었지만 회사에 도착해서 운전을 해야 될 사람들이 있어 아쉽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오후 상행선은 그리 막히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뿌듯함과 함께 아쉬움도 남는다.
예상대로 참가자 만족도는 4.9점이었다.
아쉬운 점은 개인 휴가를 썼다는 것. 일부 밤늦게까지 음주와 소음으로 수면에 방해가 되었다는 정도.
우선 장소가 너무 좋았다. 멋진 여행지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게 더 큰 에너지가 되었다. 이 에너지가 회사 안에서 서로에게 전염되어 조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리라 믿는다.
벌써 내년 볼런케이션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