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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배의 생각나눔집 Feb 18. 2021

나의 생각일기 그리고 거기에 얹은 지브리

미야자키 월드

이번책은 나에게 특정 지식에 대한 인사이트를 주었다기 보다 예전에 보았던 작품에 대한 감동을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책이면서 미야자키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던 책이였다.

나는 어릴때부터 만화책을 엄청 좋아했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씩 만화카페에 들러 2~3시간씩 만화책을 산더미로 올려놓고 보는편이긴 했는데 그러다 보니 보게된 “바쿠만”


이 “바쿠만” 이라는 만화는 만화에서 만화를 그리는 만화이다 ㅎㅎ 이 만화가 일본 만화의 세계에 대해 간접체험?을 할 수 있을정도록 자세히 나와있다. 그래서 그런지 만화,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 까지 재밌게 잘그리기 위해선 만화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만화보다 책을 더 많이 읽었다. “특히 <몬테크리스토 백작> , <삼총사>, <젠다성의 포로>(후에 첫 장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 영향을 줬다)를 좋아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어렸을적 빠져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에서 미야자키 세계의 트레이드마크인 흥미진진하고 전개가 빠른 모험담의 영감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비밀의 화원>처럼 주로 어린 소녀가 등장하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도 좋아해, 후에 스위스 알프스에 사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 <하이디>를 다카하타 감독과 TV 시리즈로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사랑스럽고 평범한 아이들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키웠다.

뭔가 의외였지만? 이해가 갔다. 특히 스토리를 더 중심있게 다루는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내용의 뼈대가 굵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글을 보면 가끔씩을 소설도 읽어보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등장인물 여러명이 나오면 이 대사는 누가 말하는거지?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떨칠 수 없어 가급적 사람이 적게 등장하는 소설을 보도록 해야겠다.



<모노노케 히메>

<모노노케 히메>가 사회적, 정치적 비판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미야자키는 작품을 통해 일본 역사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는 애니메이션의 마법을 통해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존재가 육체, 성, 종족, 자연, 초자연의 전통적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를 세밀하게 만들었다.


궁극적으로 <모노노케 히메>는 선과 악이 분명한 단순한 풍자가 아닌 여러 존재가 촘촘하게 엮인 삶의 비전이다.

미야자키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인간과 자연을 동등하게 대한다. 영화는 인간을 비난하면서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환경주의 구호가 아니다. 대신 자연, 초자연, 인간이 서로 섞이고 기대는 급진적인 비전을 제시하는데, 이는 어떤 변화도 가능하게 하는 애니메이션 매체만이 표현할 수 있다.

영화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저주받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이다. <모노노케 히메>가 제시하는 두 가지 해결책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첫 번째는 영화 포스터의 캐치프레이즈이자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산에게 아시타카가 한말 “살아!”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이 메세지는 사람들이 허무에 빠져 있던 1990년대 미야자키가 절실하게 매달린 신념이다.

두 번째는 구름 끼지 않은 눈으로 보는것이다. 영화는 피에 굶주린 괴물의 공격과 인간의 무자비한 산업화를 동시에 보여주며 관객에게 세상의 모든면을 선명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도록 요구한다.


짧은평 : 모두 각자의 이유로 살아남기 위해 행동하는 것일텐데 무조건적인 악이 있을까?현재의 나에게 아시타가가 한 말 “살아!”는 “고민만 하다 포기하지 말고 해봐!”라도 들렸다. 앞으로의 나에게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때 아시타카의 “살아!”를 되새겨야 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 예순이 된 그는 복잡한 현대의 삶을 이해할 만큼 원숙했지만, 분노와 실망은 여전했다. 영화는 선과 악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대사의 이면에는 분노가 흐른다는 점에서 <모노노케 히메>와 비슷하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미야자키는 먼 과거 세계를 떠나 현대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영화가 개봉된 2001년 물질주의 문화의 수렁에 뻐진 일본인들은 영적 공허함을 잊기 위해 무분별한 소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미야자키는 치히로의 부모를 통해 자신이 보기에 특히 탐욕스럽고 소비에 눈이 멀었으며 이기적인 30~40대 일본인들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했다. 새로 뽑은 아우디를 몰고 신비의 마을에 들어선 치히로의 아빠는 주인 없는 식당에서 함부로 음식을 먹으면서 현금과 신용카드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수동적이고 차가운 엄마는 남편 말은 무조건 따르면서 무서워하는 딸에게는 “달라붙으면” 힘들다고 핀잔한다.

미야자키는 치히로 세대, 구체적으로는 지브리 스태프의 열 살짜리 딸 세대에게도 메세지를 주고 싶었다. 영화에 대해 회의하다가 한 스태프가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자 미야자키는 역시 직설적으로 딸과 친구들을 “굼벵이”라고 불렀다. 미야지키는 아이들의 생활방식을 점점 걱정했다. 오랫동안 그는 밖에 나가 노는 아이가 적어지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아이들에게 TV에서 지브리 비디오를 보지 말고 밖에서 진짜 세계를 경험하라고 당부했다.

이런 이유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열 살 주인공은 구원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 힘겨운 노동, 자기 규율, 타인에 대한 친절, 도전에 대한 의지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미야자키는 영화감독이자 애니메이션 거장이기 때문에 질책이 아닌 현실적이고 흥미로운 수단으로 젊은 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영화에서 훈계나 설교가 아닌 ‘메세지’를 전달한 방식은 기적에 가깝다. (모험, 마법, 약간의 로맨스를 통해 온통 뒤죽박죽인 세상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그들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어둠을 초월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했다.


‘굼벵이’에서 용감한 소녀로 진화하는 치히로에게도 많은 관객이 동질감을 느꼈다. 혼란스러운 21세기 일본에서 ‘평범한’ 주인공이 갖가지 역경을 이겨내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매료됐다.

나는 이 ‘굼벵이’단어 를 신체적 활동이 아닌

경제적 활동으로 한번 바라보았다


한국,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20~30대 사람들이 경제적인 독립을 하지못하고 부모에게 붙어있는 “캥거루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 또한 이제 26살임에 불구하고 부모님의 지원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치히로의 역경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보며 내년에 “대학원”을 가서 공부를 하겠지만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말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물론 “ 맥락적 사고”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으로 지원을 받지않는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춰 거기에 맞는 역경에 대비가 되어있다면 해보는것도 좋지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나는 운이 좋게 대학교가 국립이라 학비가 싸며 1학년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1년 전액장학금을 받았고 복학할때는 다자녀의 혜택이 늘어나 또 전액장학금으로 나머지 2년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난 이 행운을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에 재투자 해보고자 한다.

갑자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이런생각을 했다 생각하니 생뚱맞기도 하겠지만... 요즘의 나를 반영한 서평인듯 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주문이나 저주가 항상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저주와 주문의 목적은 힘과 통제력이다.

하울은 수많은 저주를 목격하는데, 그중에는 황무지의 마녀가 소피에게 건 노화의 저주도 있다. 한순간에 늙어버린 소피는 절망하는 대신 곧장 길을 떠나 하울의 성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전통적인 판타지였다면 소피는 저주를 풀기 위해 온갖 역경을 헤쳐나갔겠지만, 미야자키의 이야기에서는 부지런히 성을 청소하면서 하울을 사랑하고 돌보는 사이 저주가 어떤 고통 없이 사그라진다.


아흔 살 노인이 겪는 신체적 고통과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은 소피는 오히려 해방감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성에서 그는 자신감을 얻는다. 건강한 열여덟 소녀였다면 수치심 때문에 성에 머물러도 되는지 말조차 꺼내지 못했겠지만, 아흔의 노쇠한 소피는 거의 막무가내로 눌러앉는다. 

소피는 노파로 변했기 때문에 하울과도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 열여덟 수줍은 소피라면 자신이 추파를 던지거나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절대 먼저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해진 노인 소피는 성과 성의 거주자들을 지키기 위해 하울과 고민한다.

고타니는 소피의 진짜 저주가 노인이 된 게 아니라 그 전에 어린 소녀로 살아야 했던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예뻐 보여야 한다거나 남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기대는 어린 소녀를 사회적으로 구속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가게에 진열된 화려한 모자들 대신 수수한 모자를 고집하는 소피의 모습은 이런 사회적 강요를 거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노인으로 변하고 나서야 젊은 여성을 구속하는 제약에서 비로소 완전히 벗어난다.



<하울> 작품을 보고 느낀점은 

“마음가는 대로 눈치보지 말고 좀더 뻔뻔해지자?”

 난 항상 핑계가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빈틈이 생길것 같은 문제에는 다치지 않으려고 칼같이 철벽을 세우려고 노력했고 그러면서 누군가와 트러블 없이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건 존재하지 않거나 지속 불가능한 삶이었다. 깨닫고 나니 다양한 고민으로 도전하지 않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였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이런면에서 오히려 소피가 노인이 되어서 거침없이 했던일들을 나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걱정대신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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