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집단 최면

사피엔스

by 지훈

자본주의란 어쩌면 거대한 집단 최면과 같다. 우리는 신용을 기반으로 구성된 이 사회 속에서, 알게 모르게 어떤 믿음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팽창할 수 있었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정답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그것은 미래는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희망 하나가 거대한 시장을 작동시키는 연료 역할을 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이유, 저축을 하고 투자를 하는 이유. 이 모든 행위의 이면에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라는 집단적 기대가 깔려 있다. 과학은 발전할 것이고, 효율적인 에너지원은 개발될 것이며, 새로운 수요가 끊임없이 창출될 것이라는 낙관은 지난 수백 년간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 왔다. 인류는 나무를 태워 난방하던 시절에서, 이제는 원자력과 인공지능을 다루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 변화는 놀랍지만, 모두 더 나은 내일이라는 믿음 위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경제의 법칙 안에서 끊임없이 조정되고 재편된다. 우리는 수요를 늘리기 위해, 공급을 효율화하기 위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연구하고 투자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삶과 시간은 신용이라는 이름의 자본 단위로 환산된다. 신용은 단순히 돈을 빌릴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미래를 얼마나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이며, 결국 사회적 신뢰의 화폐화된 형태다. 그렇게 우리는 신용을 획득하기 위해 살아가고, 점점 더 미래에 예속된 삶을 산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조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현재를 감각하지 못하게 된다. 더 나은 내일에 매달린 나머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감각은 점차 흐려진다. 마치 눈앞에 안개가 낀 것처럼, 우리는 무엇이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미래라는 신기루를 따라간다. 이는 단지 개인의 착각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인식의 틀이다. 많은 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누구도 그 방향이 옳은지 묻지 않는다. 묻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쉽고, 대다수는 의심 없이 함께 움직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가린 채, 마치 실에 묶인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의 자유가 커진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란 단지 할 수 있음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시작한다. 선택이란 곧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거대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자각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정위(定位)하는 일이다.


“나대로 산다”는 말은 흔히 자기중심적이거나 반사회적인 태도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나대로’란, 충동적인 자기표현이 아니라 철저한 자각에서 비롯된 삶의 태도다. 그것은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왜 그렇게 믿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향성과 나의 인식 체계 전체를 되짚어보는 행위다. 우리는 대부분, 내가 무엇을 믿는지보다 ‘믿게 된 이유’를 놓친 채 살아간다.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사회가 옳다고 말해온 대로, 다수가 따르는 흐름대로 우리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는 동안, 내가 보는 세계는 어느새 내 것이 아닌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형성된 세계관은 나의 감각과 시야를 잠식하고, 자본주의적 가치와 규율에 의해 끊임없이 정렬된다.


자유는 단순히 선택지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이유를 나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는 상태, 다시 말해, 내 시선과 내 믿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외부의 강요나 무의식적 습관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다.


“나대로 산다”는 선언은 그래서 무조건적인 자기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가 유도하는 욕망, 경쟁, 효율성이라는 가치들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내적 힘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생산해야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나는 점차 자율성을 잃고, 정해진 틀 안에서 역할만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대로 산다는 것은 외부 질서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내면 질서의 회복이다. 그것은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바라보는 용기이자, 이 세계의 구조를 자각하는 통찰이며, 결국에는 자본주의적 최면에서 벗어나 첫 발을 내딛는, 작지만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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