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고독을 정신적 독립의 어머니라 했다. 그 말은 단순한 문장 이상의 울림을 가진다. 고독이란 단순히 혼자 있는 상태를 넘어선다. 그것은 세상과의 유대를 한 겹 벗겨낸 자리에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마주하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생각과 감정이 그제야 또렷해지고, 오히려 침묵 속에서야 비로소 삶의 질문들이 또렷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에서 처음 태양을 마주한 이처럼, 익숙한 그림자의 세계를 벗어나려면 일정한 불편과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고독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바쁜 일상에 쫓기며, 타인의 시선과 인정 속에서 정체성을 구성하고 살아간다. 그 안에서는 질문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듯이 흘러가고, 우리는 그저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안도하거나 체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문득, 흐름에서 벗어나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낯선 정적이 들이닥친다. 그 정적은 단지 외로움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삶을 하나의 항해라고 비유하는 것은 진부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진실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키를 손에 쥔 채, 우리는 나아간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고 믿으며, 망망대해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하지만 수평선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가까워질 듯 다가가도, 그 선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애써 나아가는 목적지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움직임이 멈추는 지점이 있을 뿐.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떠돌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배의 선장이기보다는 풍향에 따라 부유하는 조각배에 가깝다. 마음속에는 분명한 의지가 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열망. 하지만 그 열망은 바다의 광활함 앞에서 쉽게 희석된다. 방향을 잡으려 할수록, 방향은 더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린다. 다른 배들과 함께 항해할 때에도, 우리는 결코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각자도생, 타인의 존재는 나에게 위안인 동시에 낯섦이다. 그들은 함께 있는 듯 보이지만, 결코 나의 고독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했다. 우리는 원하지 않았지만 태어났고, 삶이라는 항해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 선택은 곧 자유이며, 그 자유는 곧 책임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형벌이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의 결과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속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우연들 속에서 방향을 정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짊어진 가장 위태롭고도 고귀한 짐이다.
나는 삶을 긍정하고자 했다. 수없이 다짐하고, 때로는 그 다짐이 진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낙관만으로는 버텨지지 않는다. 불시에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휘청이고 만다. 이 배가 견딜 수 있을까, 이 키가 끝까지 나의 의지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희망을 품는 것조차 때론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는, 의미를 창조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부조리한 삶 앞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황혼을 생각한다. 황혼은 늘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결코 찬란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덧없고 짧기에, 그래서 더 귀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삶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그 끝을 알기에, 순간을 의미로 채우려 하고, 그 무의미 속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유한함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된다.
나는 지금도 항해 중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질문이며, 나는 그 질문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겨우 실감한다. 목적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이 바다 위에서 나아간다. 의미 없는 의미를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