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지 않음의 미학

당신이 무참히 씹어재낀 카톡 52개

by 낙화유수

당신의 휴대폰 화면에는 오늘도 알림 점이 반짝인다. 열지 않은 카톡이 정확히 쉰두 개, 숫자는 작지 않지만 이 정도 숫자라면 지금의 당신에겐 과하지도 않게 느껴질 것이다. 한 번에 모두 열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하루 종일 조심스럽게 눌러 꺼놓은 마음의 스위치를 아무런 준비 없이 켤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가끔 생각한다. 응답은 예의이고, 빠른 답장은 센스라고. 그러나 몸은 다른 말을 한다. 눈꺼풀은 무겁고, 머릿속은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인다. 술도 마시지 않았거늘, 그럴 때 당신은 알림을 미뤄 둔다. 미루는 동안에만 찾아오는 고요가 있고, 그 고요에서만 느껴지는 침묵의 행복함이 있기에~~!

사람들은 어쩌면 당신을 무심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아는 진실은 다르다. 마음이 남아날 만큼만 세상에 문을 열어 두는 일이야말로 오래가는 관계의 예의라는 것. 오늘의 당신은 그 문턱을 가늠하는 어쩌면 위험한 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52개 씹었으면 무슨 핑계를 대도 개욕먹 기는 마찬가지기에)

유리컵의 물결이 흔들리는 속도와 심장의 박동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당신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당장 모든 호출에 답하는 것이 정말 나와 타자 모두를 위한 선택일까, 아니면 불안의 자동반사에 불과한가. 하지만

현실은 회사 상사의 갑질이 더럽고, 출퇴근의 지옥철이 짜증 나며 나만 바라보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 모든 걸 감내해야 한다는 X 같은 현실에 깨어보니 마누라는 애들 데리고 친정 나들이 갔고, 방에 보이는 건

민주적이고 이상적으로 나뒹구는 소주병들과 시켜 먹은 부대찌개 위 사나운 폭풍이 스치고 간듯한 어지러움만이 존재한다.

술기운이 아직 돌지만 꼭 필요한 말과 사라져도 되는 말을 구분하는 일은, 생각보다 섬세한 중노동이다.

(소주를 5병이나 혼자깐 다음날 아침이면 더 최악이다! )

6417deaf-8fa4-4181-82a7-180c5bfa98d2.png

차가운 화면광과 손끝의 미세한 떨림 강조


문득 떠오른 얼굴들이 있다. 답장을 기다릴 사람들, 내게 기대어 오던 말투들. 그들 모두를 사랑하면서도, 당신은 오늘만큼은 거리를 둔다. 사랑이란 가까움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때로는 서로의 침묵을 허락해 줄 수 있을 때 더 오래 지속된다. 가끔 양주도 사주면 더 좋고~

지하철의 새벽 칸에서 창밖을 스치듯 스캔하던 네온 간판들을 떠올린다. 온 도시가 ‘현재’라는 시간에 몰두하고 있을 때, 당신은 조금 느리게 걷기로 한다. 알림의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되돌려놓는 그 느림은 무기이자 안식처다.


열지 않은 쉰두 개의 메시지에는 사정이 있다. 그중엔 반가운 초대도 있고, 피하고 싶었던 업무도 있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반드시 답할 것과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될 것을 구분하자고. 그 약속은 타인을 위한 예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당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선이다.

책상 구석 노트를 펼치고 마음에 남은 단어 몇 개를 적는다. 여백, 거리두기, 숨, 어제 스쳤던 20대 초반의 이름 모를 미인, 다시 오라던 회사 앞 단란주점 유진이. 언제나 가끔 죽이고 싶다고 여러 번 마음먹었던 한차장.


아니 이런 아니지! 정신 차리자!~


단어를 적는 동안 복잡하던 심상들이 선명해진다. 생각은 정리되고, 정리는 당신을 단단하게 만든다. 메시지를 열지 않은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다.


가끔은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 정도면 답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 그러나 죄책감에도 적정선이 있다. 끝없이 열어젖히는 배려는 오래가지 못한다.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나를 지키는 배려가 결국 모두를 위한 지속 가능성으로 돌아온다. 아쉬운 놈이 먼저 연락하는 게 국룰이니까!

당신은 불현듯 오래전 읽었던 문장을 떠올린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언어의 또 다른 방식.’


대답하지 않음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당신은 책임지는 방식으로 침묵을 택한다. 약속한 시간에는 반드시 돌아와, 필요한 말들을 가볍지 않게 건네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알림의 목록이 다르게 보인다. 하나씩 눌러 열 때마다, 당신은 순서를 정한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대화부터 시작해도 좋고, 반대로 가장 무거운 한 통을 먼저 들어도 좋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리듬이다. 당신의 리듬으로 돌아갈 때, 대화는 다시 관계가 된다.

오늘 하루의 당신은, 열지 않은 쉰두 개의 점을 통해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 배움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내일의 몸과 마음을 지탱할 단단한 근육이 될 것이다.


b877288c-9b21-4fcc-9555-be1b33b2bf52.png

휴대폰 잔광의 번짐


밤이 오면 문득 알림을 모두 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당신은 잠시 멈춘다. 지금의 충동이 내일의 나를 지치게 하지는 않을까? 오늘의 중간지점에서 멈춰 선 당신은 스스로에게 작은 신호를 보내야 한다. 여기에 머물러도 괜찮다고, 내일의 해가 떠오르면 그때 가볍게 시작하자고.

창문을 조금 더 열자 밤공기가 방 안으로 흘러든다. 차가운 공기는 생각보다 친절하다. 당신의 뜨거운 조급함을 식혀주고, 말의 온도를 조절해 준다. 그렇게 온도와 속도를 맞춘 뒤의 대화는 덜 날카롭고 더 정확할 것이다. 관계는 온도와 속도가 맞을 때 오래가는 법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당신이 열지 않은 메시지들은 당신을 외면한 흔적이 아니라, 당신이 자신에게 건네는 최후의 호의였음을. 덕분에 당신은 하루를 무사히 건넜고, 무사히 건넌 하루가 쌓여 당신이라는 시간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뒤집어 책 위에 올려놓자!


‘응답하지 않음은 무례가 아니라 리듬이다. 리듬을 되찾은 사람은 내일 더 정확히 응답할 수 있다.’ 그제야 알림 점들의 빛이 덜 날카롭게 느껴진다.

이따금 당신은 메시지를 열지 않은 사실을 변명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변명은 또 다른 피로를 낳는다. 설명 대신 행동을 택하자. 내일 아침, 첫 알림 한 통에 진심으로 답한다. 짧아도 성실하게, 빠르지는 않아도 분명하게. 그 한 줄이 오늘의 침묵을 충분히 해석해 줄 것이다.

불 꺼진 방에서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다. 화면 속 수많은 말보다 더 중요한 단어는 언제나 당신의 호흡과 리듬이다. 내일의 알림들이 다시 몰려와도 괜찮다. 당신은 배운 대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문을 열면 되는 것이다. 응답하지 않음의 미학은 결국, 당신을 잃지 않고 타자에게 닿는 가장 단단한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기억하자.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에는 분별과 애틋함, 그리고 다시 만날 용기가 숨어 있다. 그 용기가 당신을 내일의 대화로 이끌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이어폰 속의 작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