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제국의 오만과 뼈아픈 반성문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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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왜 놓쳤나, 그리고 어떻게 돌아왔나
2025년 초, 반도체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세계 1위 메모리 기업이 HBM 인증을 못 받고 있다."
삼성전자 이야기였다. 반도체 매출 세계 1위. D램 기술 40년 역사. 수백조 원의 설비를 가진 기업이, 고객사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납품을 못 하고 있었다. HBM3E에서 삼성전자는 뒤늦게 인증을 마무리하며 '후발주자' 이미지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강자의 저주
역사에는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 가장 강한 자가 변화를 가장 늦게 읽는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 그러나 필름 사업이 너무 잘 됐기 때문에 자신이 발명한 기술을 스스로 죽였다.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대를 예견했다. 그러나 피처폰이 주는 안정적인 수익이 너무 달콤했다.
삼성에게 D램은 코닥의 필름이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공정 노하우, 원가 절감 능력, 대량 생산 시스템 — 모든 것이 기존 D램에 최적화돼 있었다. HBM은 그 논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술이었다.
D램을 수직으로 쌓는다는 것은 생산 효율을 포기하는 결정이다. 기존보다 3~5배 긴 공정, 복잡한 패키징, 낮은 초기 수율. 원가 절감의 귀재인 삼성의 논리 체계에서 HBM은 처음부터 불편한 선택지였다.
삼성이 나쁜 판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기존 논리에서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볼 것인가
AI가 등장하기 전, 메모리시장의 승부는 단순했다. 얼마나 싸게 만드는가. 얼마나 많이 만드는가. 삼성은 이 게임의 챔피언이었다.
그런데 AI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빠르게 데이터를 이동시킬 수 있는가.
2부에서 봤듯, AI의 진짜 병목은 연산이 아니라 대역폭이었다.
삼성이 수십 년간 갈고닦은 '싸고 많이' 역량은 이 질문 앞에서 갑자기 부차적인 것이 됐다.
반면 SK하이닉스는 달랐다. 삼성보다 규모가 작았기에, 오히려 선택을 강요받았다. 삼성처럼 모든 영역에서 싸울 수 없었다. 어딘가에 집중해야 했다. 그 집중이 HBM으로 향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대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약점이 선택을 낳고, 선택이 집중을 낳고, 집중이 지배력을 낳았다.
왕의 귀환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삼성은 쓰러지지 않았다.
2026년 2월 12일, 삼성전자가 6세대 HBM4를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했다.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6% 이상 급등하며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Econmingle) 불과 1년 전까지 HBM3 E 납품도 늦었던 기업이, HBM4에서는 경쟁자보다 먼저 출하선에 섰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숫자가 아닌 현장의 목소리
삼성의 반전은 단순히 설비를 늘려서 얻은 결과가 아니었다. 뼈아픈 반성문 끝에 실행된 것은 조직의 근원적 체질 개선이었다.
과거 삼성의 의사결정은 '관리'와 '재무 논리'가 지배했다. 2019년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HBM 개발팀이 축소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HBM3E의 고전 이후, 삼성은 '엔비디아 전담 TF'를 단순한 협력 부서가 아닌, 전사적 권한을 가진 직속 기구로 격상시켰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엔지니어 중심의 의사결정 회복이었다. 윗선의 보고를 위한 서류 작업 대신, 연구실의 데이터와 수율 현장의 목소리가 경영진의 판단보다 우선시 되기 시작했다. "안 된다"는 엔지니어의 경고를 "방법을 찾아라"라는 압박으로 뭉개지 않고, "왜 안 되는지"를 함께 고민하며 설계 자체를 뜯어고치는 유연함이 살아난 것이다.
이 '기술 우선주의'의 복원이 2026년 2월, 삼성전자가 6세대 HBM4를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하게 만든 진짜 원동력이었다.
단순히 조직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삼성은 자신의 강점을 재정의했다. 메모리 설계, 파운드리, 패키징 — 이 세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기업은 세계에서 삼성뿐이다.
HBM3E에서는 이 강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HBM4에서는 달랐다. 삼성은 베이스 다이에 자사 4 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직접 투입해 납기 경쟁력을 높였고, 핀당 전송속도 11.7 Gbps를 달성해 엔비디아 요구 기준을 웃도는 성능을 냈다.
그 결과 엔비디아의 재설계 요구 없이 한 번에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며 메모리 3사 중 가장 먼저 출하에 이르렀다. 이어 불과 한 달 뒤 GTC 2026에서는 차세대 HBM4E까지 공개했다. 한 세대 뒤처졌던 기업이 다음 세대를 먼저 선보인 것이다.
패배에서 배운 것
삼성의 반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속도가 아니다. 무엇을 배웠는가이다.
HBM3E에서의 실패는 삼성에게 고통스러운 자각을 줬다. 기술력이 아무리 좋아도,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읽지 못하면 시장에서 진다. 엔비디아가 원하는 것은 삼성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메모리가 아니라, 엔비디아의 시스템에 최적화된 메모리였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였다. 고객의 언어로 설계하는 것. 고객의 일정에 맞추는 것. SK하이닉스가 수년에 걸쳐 엔비디아와 쌓아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삼성은 늦게 깨달았지만, 깨달은 뒤에는 빠르게 움직였다. 업계에서는 HBM4 세대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 간 기술·수율 격차가 거의 동일한 수준까지 좁혀졌다는 평가도 조심스럽게 나오긴 한다.
노자는 말했다. 지상왈명(知常曰明): 이치를 깨닫다
삼성이 HBM4에서 보여준 반격은 시장의 무게중심이 '공급자 논리'에서 '고객 최적화'로 이동했다는 이치를 뒤늦게나마 처절하게 깨달은 결과다. 이제 삼성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메모리가 아니라, 엔비디아가, 그리고 샘 올트먼이 꿈꾸는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조각을 먼저 내민다.
그러나 전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HBM이 데이터를 주고받는 '통로의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혁명이라면, 이제 AI는 또 다른 갈증을 호소하고 있다. 바로 '무한한 확장의 공간'이다.
아무리 통로가 넓어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작으면 거대한 AI 모델은 길을 잃는다.
삼성이 HBM의 뼈아픈 지각을 발판 삼아, 아예 판 자체를 새롭게 짜고 있는 또 하나의 전장.
4부에서는 '속도'의 전쟁을 넘어 '무한 확장'의 시대를 여는 CXL(Compute Express Link)의 세계를 해부한다.
HBM이 GPU라는 주연 배우의 대사 전달력을 높였다면, 이제 삼성은 무대 뒤에 인류의 모든 지식을 담을 '무한한 도서관'을 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