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지혜 vs 오만한 권위

수영장 회식에서 만난 진짜 지혜

by 크리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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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수영장 회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밤 9시, 연수반 수영을 마치고 함께 온 사람들과 근처 족발집에서 회식을 했다. 맥주 한 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H가 물었다.


"수영장에서 일하는 J 씨가 누구의 처제라고 했던데요?"


"처제"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분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 처제가 무슨 뜻이에요? 처의 제자가 무슨 자인지 궁금해서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느꼈다. 진심 어린 호기심과 겸손함이 어우러진 따뜻한 빛이었다. 부끄러움 없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그 모습은 오히려 더 크고 신선한 용기처럼 다가왔다.


수영강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 처는 언니라는 뜻이고요, 제자는 형제 제(弟) 자요. 한국에서는 보통 아내의 여동생을 말하는 거죠."


"아~ 그렇구나! 감사해요."


그녀의 말투에는 두려움보다는 배우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가득했고, 설명을 들은 후 눈가에 스며든 작은 환함은 진정한 지혜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려주는 듯했다.


그 순간 내 안에도 묵직한 감동이 자리 잡았다.


"정말 현명하시네요."


내가 그 여성분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람이 자기가 확실히 모르는 것에 대해 모른다는 걸 남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물으시는 용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 아는 그런 분들이야말로 진짜 현명한 분이 아닐까요?"


그 여성분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몰라서 물어보는 게 뭐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요. 오히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게 더 부끄러운 거죠."


그 순간 소크라테스의 말이 현실로 느껴졌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지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며칠 후, 나는 완전히 정반대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카페에서 만난 가짜 권위


오늘 저녁, 오래 알고 지낸 대학 교수님을 만났다. 서울대 OO학과를 나와 현재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당분야에서 명성 있고 예리한 면이 있어 호감인 그분과의 만남은 대부분 온화했다.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은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대화는 주로 평범한 일상 얘기였다. 과거에 정치나 시사 문제를 논하면 그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언젠가 서로 약속했었다. 다시는 시사나 정치 문제는 토론하지 말자고.


그런데 오늘 웬일인지 어디 공공기관에 강의를 가신다며 팸플릿을 보여주셨다. 그냥 예의상 관심으로 뭐에 관한 건지 물으니 "아, 미국 관세 협상" 관련 강연이라고 하시면서...


교수님은 즉시 살짝 격앙된 어조로 말씀하셨다.


"이 정권은 정말 무능해요. 관세 협상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내 마음 한편에서 '아, 또 시작이구나'라는 예감이 스쳤다. 하지만 정중히 물어봤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요?"


"미국 관세가 0%에서 25%로 올라갔잖아요. 완전히 실패한 거죠."


나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의 확신에 찬 어조가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다.


"교수님, 제가 알기로는 실제로는 윤석열 정부 때 25%로 올라갔던 관세를 현 정부에서 현대자동차의 경우는 15%로 낮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그분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우리 쪽을 흘끔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긴장감과 답답함이 서서히 마음을 짓누르는 걸 느꼈다.


"0%에서 25%로 올라간 게 맞습니다! 제가 이 분야 전문가인데 잘못 알 리가 있겠어요?"


나는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1기 때 시작된 관세 정책, 윤석열 정부 시절 실제 25% 관세 부과, 그리고 현 정부의 15% 협상 성과까지. 구체적인 시기와 배경, 협상 과정에 대해서도.


하지만 교수님은 들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런 정보 어디서 들었어요? 저는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는 사람인데요. 실제 관세가 부과된 적은 없고 미 의회에서 소송 중인 거예요."


권위를 내세우는 말과 확신이 나왔다. 내가 수십 년간 이런 류의 사람들과 대화하며 익숙해진 패턴이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 진실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지키려는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에 미묘한 아쉬움과 무력감이 번졌다.


"그럼 그 정보는 어떤 매체에서 확인하셨나요?"


"조선일보에 정확히 나와 있어요. 조선일보가 가짜뉴스를 쓸 리가 있나요?"


그분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보여주려 했다.


"교수님, 혹시 다른 언론도 함께 보시고 판단하시면 어떨까요? 한겨레라든지 다른 매체들도요. 교차검증 말이에요."


"교차검증이요?"


그분의 표정이 잠깐 당황스러워 보였다.


"네, 요즘 같은 시대에는 하나의 언론사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은요."


그제야 그분은 스마트폰으로 다른 검색을 시작했다. 몇 분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대화를 이어가며 내내 마음 한편에 '진실 앞에서 겸손할 수 없는 무게'가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20여 분이 지나서야 그분이 겨우 살짝 인정하는 말씀을 하셨다.


"어... 그러고 보니 25% 관세가 실제로 부과됐다는 기사가 있네요."


목소리는 여전히 날이 조금 서 있었다.


"아, 2025년 4월부터 현대자동차에 관세 부과를 실제로 실시했군요."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완강하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25%에서 15%로 낮춘 게 뭐가 잘했다는 거예요? 원래 0%였는데요!"


이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권위에 기대 진실을 외면하는 모습에 슬픔마저 피어올랐다.


"교수님, 그렇다면 현 정부를 비판하시려면 전 정부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25%에서 15%로 낮춘 건 분명히 개선 아닌가요?"


"..."


살짝 노여움이 한 스푼 얹어진 표정이셨다.


"아니면 미국의 관세 정책 자체를 문제 삼으셔야죠. 한국 정부 탓만 하실 건 아니지 않나요?"


교수님은 한동안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25%가 실시된 적은 없고 실시한다고만 했다, 미 의회 권한이라 아직까지 소송 중이다 등등. 그러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내셨다.


"한미 FTA 국가는 관세 제로예요..."


논점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교수님, 그럼 FTA 맺은 다른 국가는 부과 안 하고 우리나라만 부과한 건가요?"


"다른 나라도 부과 다 했죠."


---집요한 부인과 논리의 비약


그 카페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얼마나 많은 진실과 지혜를 잃게 되는가?'


하지만 교수님의 '저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정권의 외교 실패는 명확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요?"


"전반적으로요. 외교라는 게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데..."


추상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려 하셨다.


"교수님, 그런데 관세 문제로 돌아가서, 25%에서 15%로 낮춘 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아니, 제로에서 15%예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아, 차라리 벽과 얘기해도 이보다 나을 것 같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려 하셨다.


"하지만 애초에 0%였는데 15%가 된 것 자체가 문제 아니에요?"


"교수님, 그럼 윤석열 정부가 25%로 올렸을 때는 어떻게 평가하셨나요?"


"그때는... 그때 나름 이유가 있었겠죠."


명백한 이중 잣대였다. 전 정부의 25% 인상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현 정부의 15% 인하에는 '원래 0%였는데'라고 따지고 계셨다.


"교수님, 혹시 정치적 성향이 판단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요?"


"무슨 소리예요! 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객관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분명했다. 조선일보 하나,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선호도. 더 괴이한 건 극보수도 아닌 진보 성향이신데 팩트체크는 조선일보로 하신다는 점이었다.


아, 이것도 현실인가?


계속 고집과 같은 말만 반복하셔서, 결국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


"할아버지!!!"


그 기세로는 카페 테이블을 뒤집을 줄 알았는데, 못 들은 척하시고 넘어가셨다. 역시 노회 하시다.


"학자가 그런 괴상한 논리 비약을 하시면서..."


그러자 그분이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셨다.


나는 산꼭대기 카페에 혼자 남겨졌다. 차도 없고, 밖의 모닥불 앞에서 불멍을 때렸다. 집에는 가야 하는데... 아, 여름밤인데도 어찌 불 앞이 안 뜨겁나? 이 불은 오히려 시원하다. 지식인의 똥고집에 비하면.


집이고 뭐고 포기하고 하염없이 멍 때리고 있는데, 멀리서 "갑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다.


못 이기는 척, 같이 차를 타고 내 차까지 무사히 왔다.


그 답답함과 무력감 속에서도 나는 끝내 희망의 조각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나아갈 길이며, 그 길에 서 있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인임을.


---두 개의 대조되는 풍경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분과 교수님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 여성분은 '처제'라는 평범한 단어의 한자 뜻을 몰랐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설명을 들으면 바로 받아들였다.


교수님은 관세 정책이라는 복잡한 사안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더 '교육받은' 사람인가?


---SNS와 알고리즘이 만든 정보 거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교수님은 평소 내게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요즘 트위터에서 많은 사람을 팔로우하고 있어요. 가장 최신 정보가 많이 올라오거든요."


"다양한 사람들을 팔로우하세요?"


"주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요..."


문제가 보였다. 그분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 주는 정보만 선별적으로 소비하고 계셨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어떨까? 한 번 특정 성향의 영상을 보면, 계속 그런 영상만 추천한다. 진보 성향도 마찬가지다.


더 심각한 건 요즘 ChatGPT 같은 AI도 사용자의 성향에 맞춰 답변을 조정한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원하는 답을 주려고 한다. 그래서 감정 기반 ChatGPT가 가장 정보 오류가 심하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정보 거품' 안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전문가라는 이름의 함정


더 큰 문제는 교수님이 '전문가'라는 지위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분은 월급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방송에 출연해 전문가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정책 자문을 하기도 하고, 많은 시민단체의 수장도 하신다.


그런 분이 가장 기본적인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하나의 언론사만 보고 판단한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내가 지적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집요하게 부인하고, 논점을 바꾸고, 권위로 누르려 하셨다.


"내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사람인데..."

"내가 이 분야 전문가인데..."

"조선일보가 틀릴 리가 있나요..."


평소는 그리 점잖으신 분이 반말까지 하시며 격앙하셨다.


--- 주입식 교육의 숨겨진 폐해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또 평소 늘 경험하던, 특히 서울대 출신들에게서 같은 성향을 발견한다. 늘 자신만만하고 최고의 지성이라 여기며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만들어낸 치명적 부작용이었다.


우리 교육 시스템은 '정답'을 빨리 찾는 능력을 기른다. 암기를 잘하고, 문제 풀이를 잘하는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간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문제'를 다루는 능력은 기르지 못한다. 여러 관점을 종합해서 판단하거나, 맥락적 사고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한다.


더 심각한 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보다 '격'이 낮다고 여기는 상대방과 대화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자신들이 성적순으로 최고 학부를 나왔으니 대한민국 대통령도 서울대 아니면 격이 낮은 셈이고, 전 국민이 그 대상이 되는 셈이다.


--- 권위주의 문화의 뿌리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 문화도 한몫했다.


"서울대 출신", "교수",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 그런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도전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내가 전문가인데 네가 뭘 안다고..."


이런 마음이 은연중에 작동한다.


하지만 진실은 타이틀을 따지지 않는다. 사실은 사실이고, 논리는 논리다.


--- 언론의 책임과 편향성


조선일보에 대한 맹신도 문제였다.


"조선일보가 틀릴 리가 있나요?"


하지만 모든 언론은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도 예외가 아니다.


언론사들은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같은 사실을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보도한다. 때로는 특정 사실을 왜곡도 서슴지 않고 부각하거나 축소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차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여러 언론의 보도를 종합해서 판단해야 한다.


- --겸손한 지혜의 힘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처제가 무슨 뜻이에요?"


이 간단한 질문 속에 얼마나 큰 지혜가 담겨 있었던가.


-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용기

- 배우려는 열린 마음

- 권위나 체면보다 진실을 우선시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진정한 지성의 출발점이 아닐까.


반면 교수님에게서는 정반대를 보았다.


-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는 고집

-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려는 마음

- 권위로 진실을 덮으려는 시도


AI 시대, 더욱 위험해진 확증편향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할' 콘텐츠만 보여준다.


더 심각한 건 ChatGPT 같은 AI 서비스다. 사용자의 질문 패턴을 학습해서, 그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의 답변을 주려고 한다.


결국 우리는 점점 더 견고한 '확증편향의 성'을 쌓아가고 있다.


--- 정보 민주주의 시대의 과제


이제 우리는 '정보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건 '정보 해독 능력'이다.


- 어떤 정보가 신뢰할 만한가?

- 어떤 출처가 편향되어 있는가?

- 어떻게 여러 관점을 종합해서 판단할 것인가?


--- 전문가의 새로운 역할


전문가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판단의 근거를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가 전문가라서 제 말이 맞다"가 아니라, "이런 데이터와 이런 논리로 봤을 때 이렇게 판단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정보나 논리가 제시되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는 교육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정답'을 빨리 찾는 능력보다, '좋은 질문'을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 개인의 각성이 먼저다


하지만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개인부터 각성해야 한다.


- 하나의 언론사만 보지 말자

-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자

- 무엇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자

- 권위나 타이틀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로 판단하자


--- 진정한 지성인이 되는 길


오늘의 경험은 늘 그렇듯 깊은 생각에 빠뜨렸다.


진정한 지성인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사람이다.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분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인이었다.


"처제가 무슨 뜻이에요?"


이 간단한 질문 속에 담긴 겸손과 호기심이, 어떤 박사 학위보다 더 값진 것이 아닐까.


-- 맺으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지금 우리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정보 과잉의 시대, AI의 시대, 확증편향이 더욱 강화되는 시대를 맞아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겸손한 지혜의 길인가, 오만한 권위의 길인가?


열린 마음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길인가, 닫힌 마음으로 편견을 고집하는 길인가?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진정한 지혜는 언제나 겸손한 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나는 권위가 아니라 진실에 기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제가 무슨 뜻이에요?"라고 자연스럽게 물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 당신에게 묻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당신 주변에도 분명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당당히 물어보는 사람과,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사람.


진실 앞에서 겸손한 사람과, 권위로 진실을 덮으려는 사람.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는 사람과, 자신의 편견만 고집하는 사람.


당신의 아이들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가?


--- 희망은 여전히 있다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지만, 희망은 여전히 있다.


수영장에서 만난 그 여성분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희망이다.


진실을 추구하고, 겸손을 잃지 않으며,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그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 불멍을 때리며 생각한 것


그날 밤 빨간 석류알 터진 모닥불 앞에서 묵상했다.


불은 연료를 태워서 빛을 내고


마찬가지로 진정한 지혜는 자만심을 태워서 겸손함이라는 빛을 내며


오만함을 태워서 열린 마음이라는 따뜻함을 만들어낸다는 것.


편견을 태워서 진실을 향한 용기라는 에너지를 얻는다.


그렇기에 그 불은 뜨거운 여름밤에도 선선했다. 진정한 지혜의 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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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성은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용기야말로 우리가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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