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기 일본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근대화를 이루고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고 있을 때, 왜 청나라는 일본처럼 완전하게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을까?
철학자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중국은 바다를 단지 '끝'으로 보고, 이를 넘어서는 탐험이나 교류를 시도하기보다는 방대한 내륙에 의존해 왔다. 이는 '중화'라는 세계 중심적 사고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중화사상은 다른 민족이나 문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척하고, 중국 대륙이 모든 진리의 중심이라는 믿음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바다가 인간들에게 제한된 사고와 행동의 범주를 벗어나도록 부추겼던 반면, 중국은 중국 대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헤겔은
“예컨대, 중국의 경우처럼 바다를 접하고 있더라도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체계에서 땅덩어리의 한계를 넘어 바다 밖으로 뻗어 나가는 일은 없다. 그들에게 바다란 단지 한계일 뿐이며, 땅이 멈추는 지점으로 그들은 바다와 긍정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라고 강의했다.
이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시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국 스스로를 ‘중화(中華)’라고 여기고 나머지 국가는 오랑캐로 간주했다. 중국이 진리이자 근본이라면, 그 이외의 국가나 민족은 오랑캐였고, 중화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여겼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882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다.
朝鮮久列藩封, 典禮所關一切, 均有定制, 毋庸更議.
(조선은 예부터 중국의 속국으로 재론할 여지가 없다.)
이는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명문화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약의 명칭에서 ‘장정(章程)’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부터 청과 조선의 상하 관계를 보여준다. 조약의 전문에도 종속 관계를 명시하며, 조선 국왕과 청의 북양대신을 동급으로 규정하고, 영사 재판권을 초월하는 사법 관할권을 청나라가 가지도록 했다.
중화사상과 근대화의 실패
이러한 중화사상은 중국이 일본처럼 근대화를 이루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중국인들은 중국 이외의 나라는 오랑캐라고 생각했고, 모든 진리는 중국 대륙에 있다고 믿었다. 이는 외국인 강사를 중국 학교에 채용해 중국인들에게 가르치자는 공친왕의 계획을 반대하는 한림원 수장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상소에서
本之圖,在人心不在技藝。今求之一藝之末,而又奉夷人為師,無論夷人詭譎未必傳其精巧,即使教者誠教,學者誠學,所成就者不過術數之士,古往今來未聞有恃術數而能起衰振弱者也。天下之大,不患無才。如以天文、算學必須講習,博採旁求,必有精其術者,何必夷人,何必師事夷人?且夷人吾仇也。倘延夷人為師,禍患無窮,甚至亡國滅種。
(출전: 同治 6년(1867) 倭仁의 상소)
“입국지도(立國之道)는 예의(禮義)에 있지, 권모술수(權謀術數)에 있지 않다.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은 인심(人心)이지, 기예(技藝)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즉, 서양 과학기술 같은 기교적 지식은 국가 부강의 근본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유교 윤리와 충의야말로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전통 한학을 익힌 사대부가 오랑캐의 스승에게 배우는 것은 예의상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다.
“천하가 넓은데 중국 대륙에 인재가 없을 리가 없다. 서양의 천문·산술에 통달한 인재를 구하려 한다면 중국인 중에서 모집하면 될 일이지, 어찌하여 외국인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가?”
라고 하며 외국인(오랑캐) 스승 채용 계획을 강하게 비판했다.
청나라 내의 기득권 세력과 보수파들은 대부분 한림원 수장의 생각과 비슷했다. 그들은 학문을 도덕 수양과 치도(治道)를 위한 것으로 보았고, 서양의 과학이나 수학은 단순한 잡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예를 들어, 보수학자인 한림원 수장 워신(倭仁)은 수학과 과학 등 서양 과학기술을 "一藝之末"(하찮은 기예의 끝자락)으로 폄하했다.
또한, 이러한 학문들은 이미 중국 대륙에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천문학과 수학은 『주비산경(周髀算經)』과 『춘추(春秋)』에서 비롯되었고,
화학은 『서경(書經)』과 『회남자(淮南子)』에서 나왔으며,
물리학은 『항창자(杭昌子)』에서,
광물학은 『서경(書經)』에서,
전기는 『관음자(觀音子)』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화사상에 기반한 청나라 보수파들의 사고방식과 이에 따른 개혁의 실패는 결국 서양 열강에게 지속적인 패배를 가져왔다. 심지어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는 일본에게까지 패배하며, 결국 청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바다(대양)를 단지 땅의 끝으로 간주했던 중국과 달리, 서구와 일본은 바다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로 인식했다. 제한된 사고와 행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기존 관념의 붕괴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일본은 학문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중국과 차이가 있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1733~1817)의 『난학사시(蘭學事始)』에 나와있는 제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기존 유학적 관점과는 달랐다.
겐파쿠는 제자을 찾는 데 있어 가문의 배경이 아니라, 실증적 학문 태도를 중요시했다.
此男の天性を見るに、凡そ物を學ぶ事實地を踏ざればなすことなく、心に徹底せざることは筆舌に上せず、一體豪氣は薄けれども、すべて浮たる事を好ず、和蘭の窮理學には生れ得たる才ある人なり。
(겐타쿠란 사람을 보자면, 무엇을 배우는 데는 자신이 실제로 보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고, 마음속에 납득이 되지 않으면 말하지도, 쓰지도 않았다. 기(氣)가 크고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만사를 들떠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으로 오란다 학문을 공부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일본이 서구 학문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빠르게 이루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공산혁명 이후에도 중화사상 지속
반면, 중국은 공산 혁명 이후에도 서구식 근대화를 수용하지 않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통해 “죽의 장막”을 치고 서구 세계와 독립하려 했다. 중국 지도부는 서구 중심의 문화적 패권주의에 저항하며, “근대화”를 서구의 협박으로 간주했다.
이는 중국인들에게 있어 서구식 근대화란 '굴욕의 100년'(아편전쟁~중일전쟁)으로의 회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계급의 해방을 외친 문화대혁명의 이면에도 중화사상과 유학의 잔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외세의 도움 없이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신념은 등소평 이후 약해지긴 했으나, 현재 시진핑의 중국에서도 국가 정체성과 민족주의의 핵심 요소로 작용하며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