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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기 Mar 01. 2023

심의위원의 판단_3

학교폭력 심의센터 이야기

  학교폭력은 경찰이나 검찰에서 다루는 범죄 사건과 다른 관점과 기준으로 접근합니다. 근거 법령도 다릅니다. 학교폭력은 가해자 처벌보다는 관계 회복에 보다 주목합니다. 학생의 학교생활 적응을 돕고자 하는 의도가 크며, 생활교육의 일환으로 사안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생활교육 전문가가 위원으로 참여하면 괜찮을까요? 그런데, 생활교육 전문가는 어떤 사람이죠? 전문상담교사나 청소년지도사 등 유사한 일들이 떠오르기는 하나, 법조인처럼 별도의 자격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특정 직군이 있는 것 같진 않네요. 결국 학생 생활교육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이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학교 교사일 수 있겠네요. 흔히 학교폭력 업무라고 하는 생활업무를 맡은 교사로 한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교사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학교폭력 심의라면 믿을 수 있는가요? 심의위원회 이전 단계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사안조사와 전담기구의 심의입니다. 학교폭력 사안 처리에서 학생과 보호자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접할 이들이 생활담당 교사입니다.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보호자로부터 많이 듣는 말이 “학교에서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어요.” 또는 “학교에서 잘 처리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입니다. 행여 학교의 업무처리가 미숙하거나 미진하였을 가능성까지 배제하진 않겠습니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자녀의 학교폭력 사안과 마주한 학부모는 지극히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학부모에게 학교폭력과 관련된 일은 곱게 보이지도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죠. 자녀의 일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은 학부모의 양해나 격려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업무 처리 과정에서 자녀에게 피해나 불이익을 끼쳤다고 민원이나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학교 전담기구 단계에서 불만을 가진 학부모라면 심의위원회의 교사 위원을 크게 반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심의를 맡으면 심의위원회의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사안 관련 학생과 보호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러한 사람은 없다고 말해야 할까요? 현재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개별적인 전문성만 따진다면 적절하지 않거나 흡족하지 않을 수 있으나, 각각 고유의 장점들도 분명히 있으니 이를 종합적으로 구성하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요? 심의위원회에 변호사와 같은 법조인도 있고, 학교폭력 문제에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교사들도 함께 있는 것이죠. 해당 지역의 청소년 문제를 직접 살피고 있는 경찰관이나 청소년 보호 관련 기관이나 단체에서 근무하는 분들도 참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막상 나열하고 보니 어딘가 낯익은 구성원이라 생각되지 않는가요? 사실 앞에서 심의위원회 구성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내용입니다. 지금의 심의위원회도 이러한 분들을 위원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 사안 관련 보호자들이 당장의 감정적인 상태에서 심의위원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을 수 있으나,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본다면 현재의 심의위원 구성에 큰 불만을 갖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심의위원에 대한 신뢰 문제로 돌아가 보죠. 심의위원의 전문성에 대해 만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상당 부분 수긍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정리한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심의위원 구성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분들이 있다고 했었는데, 기억나는가요? 바로 학부모 위원입니다. 전체 위원의 3분의 1 이상은 학부모 위원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설명했었습니다. 실제로 소위원회를 개최하면 위원의 절반 이상은 학부모로 이루어집니다. 위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고, 가장 수월하게 섭외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심의위원으로 위촉된 학부모는 학교 교사나 기관의 근무자들에 비해 아무래도 시간적으로 훨씬 유연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원래의 질문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학부모가 심의한 결정은 믿을만한가요? 학교폭력 전문성을 고려한다면, 부족함이 있진 않을까요? 전문성이 보다 높은 법조인이나 교사 등으로 심의위원을 구성하고, 학부모는 배제하거나 최소한으로 하면 어떨까요? 법조인과 학부모를 가르는 전문성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학부모의 판단을 무시하는 듯하여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자녀가 학교폭력에 연루되었다면, 다른 학부모에게 자녀의 조치 결정을 흔쾌히 맡길 수 있는가요? 


  학부모의 전문성이 문제가 된다면, 문제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우려된다면, 왜 학교폭력예방법에서는 심의위원의 3분의 1 이상을 학부모로 구성하도록 했을까요? 법령의 의도가 절대적 가치일 순 없겠지만, 최소한 상당수의 공감대를 형성했음은 분명합니다. 심의위원회에 학부모가 참여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학부모 위원이 학교폭력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갖추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학교폭력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부모 위원은 학부모라는 학교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학교폭력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라면 학교 공동체가 숙고하여 학교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나아가 일반 시민이 참여하여 학교폭력을 심의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이와 관련하여 문득 떠오르는 제도가 하나 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배심제입니다. 흔히 법원의 재판이라고 하면 판사나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의 전유물로 여기는데, ‘국민참여재판’은 말 그대로 일반 시민도 재판에 함께 참여하여 판결에 관여하는 제도입니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법적 판결의 권한을 가져도 괜찮을까요? 답을 생각해 보기 전에 이 질문 자체가 낯익지 않나요? 앞에서 심의위원의 전문성에 대해 했던 질문과 거의 같은 맥락의 물음입니다. 법적 지식에 있어 검증을 거친 전문가가 버젓이 있는 법원에서 일반 시민의 참여를 거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갈등과 반목이 가득한 사안에 대해 시민의 생각과 판단을 굳이 개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거꾸로 질문해 볼까요? 법조인의 전문적 판결은 기꺼이 수긍할만하고 공정하다고 여겨지던가요? 오히려 시민의 상식과 정서와 동떨어진 판결도 접할 수 있고, 대다수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법적 판단도 있지 않던가요? 


  이탈리아의 형법학자인 베카리아가 1764년에 발표한 저서 ‘범죄와 형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무지한 자는 감각으로 판단하지만, 전문가는 학설과 의견으로 판단한다.’ 마치 판단은 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인 것 같지만, 이어지는 내용이 반전입니다. 베카리아는 ‘전자의 판단이 후자의 판단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안내자이다.’라고 말합니다. 250여 년 전 말이라고 생각하면 꽤 혁신적이죠? 전문가보다 무지한 자의 판단이 더 믿을만하다고 합니다. 베카리오는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재판관은 유죄판결에 익숙해져 있으며, 모든 것을 그의 전문지식에서 빌려온 인위적 개념 요소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심의센터에는 전담 변호사가 있습니다. 심의위원회에 거의 매번 참석하죠. 제가 있던 심의센터의 변호사와 대화하던 중, 변호사가 일부 학생의 비행非行을 일반화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부지불식간에 젖어든 인식이었고, 무의식 중에 형성된 관점이었죠. 누구나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 영향으로 인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왜곡되거나 오염될 수 있습니다. 법원의 판사는 온갖 사건과 혐의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판단은 사회의 일반적 가치관이나 관점과 다를 수 있으며, 시민의 다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베카리오는 말합니다. ‘이러한 재판관의 학식보다는 보통 사람의 상식이 증거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더 적다. 법을 아는 일이 전문 학문이 아닌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가! 누구나 그와 동등한 이웃 시민들로부터 재판받도록 하고 있는 법제는 정말 경탄할 만하다.’ 베카리오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법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의 섭리이거나 외계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공감한 약속이자 규칙일 뿐이죠. 이러한 점에서 법이나 그 법의 적용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이나 정서와 크게 다르다면, 뭔가 주객전도된 게 아닌지 들여다봐야 할 일 아닐까요? 그래서 재판에서 배심제가 존재하는 것이겠죠.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을까요? 2021년 실시된 비율은 11%였습니다. 지방법원별로 보면 단 1건도 없었던 곳도 있고, 2020~2021년 2년 연속 0건인 곳도 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법조인의 엘리트주의로 재판의 시민 참여에 소극적이거나 회의적인 분위기가 일조한다고 보입니다. 




  재판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자는 식의 천진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법률이란 공공재에 대한 나른하고 무심한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죠. 한 사회의 원리와 규칙이 소수의 법조인의 판단에 의존하여 작동하는 상황을 당연시해서는 안 되겠죠. 학교폭력은 어떠한가요? 이는 더욱 시민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나요? 학교폭력예방법에서의 사안 처리는 학생들에게 그 사회의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여야 할 테니까요. 어쩌면 학교폭력보다 더 두려운 건 왜곡된 방식의 해결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 아닐까요? 학생들이 형식과 절차를 악용해 얻은 결과를 면죄부로 여기거나 전담기구나 심의위원회를 거치면서 상대에 대한 보복 심리만 자라나 분노의 재생산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끔찍하고 허탈한 일이 있을까요? 물론 현재의 심의위원회가 최선의 방식일 수는 없겠죠. 학부모가 심의위원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보다 공정하고 교육적인 조치를 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떠한 가치와 목적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또한 이를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가 관건일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심의위원의 전문성을 바라봐야 지금의 방식을 의미 있고 소중하게 지속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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