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교과서부터 따라가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기록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당연하게도. 1919년 대한민국(임시) 정부를 세웠을 때 정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을 1948년으로 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유는 잘 알겠지만
그보다 먼저, 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나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그다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헌법에 "임시정부의 법통"이 명시된 것은 87년 헌법때 부터 였군요.. )
아마도 역사에 관심이 특별히 없는 사람들은, 국사 교과서에 있는 내용 정도가 역사 지식의 기본치 또는 최대치가 아닐까 합니다.
교과서에 임시정부는 어떻게 기록이 되어있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국사편찬회 홈페이지에 과거교과서를 친절하게 올려놓았습니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전부 볼 수 있습니다.
6차 교육과정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대해서 어떻게 표현했는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아마도 배우신 교과서로 연식이 나올텐데요.
그동안 임시정부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는지, 생각보다도, 내용은 매우 부실했습니다.
교과서 내용을 지금까지 얼마나 기억하고 계실지.
상하이에 위치해서, 정부형태를 갖춘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라는 설명, 자금을 모으고 정보수집을 했다는 설명, 인물로는 이승만과 김규식이 언급됩니다.
87년에 제정되어 89년부터 배운 5차 교육과정의 중학교 교과서 내용을 살펴봅니다.
임시정부를 설립한 목적과, 상하이에 위치한 이유가 나옵니다.
언급되는 인물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언급됩니다.
꼭 언급되는 "연통제", 그 밖에 임시정부의 중심 활동은 "외교활동" 입니다.
1919년대부터 20년대 초반 활동에 중심이 맞춰져 있습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이 때까지 여러 곳에서 주도해 오던 독립 투쟁을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에 호응하여 국내외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여러 곳에 세워진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하였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1919).
당시의 상하이는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일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외교 활동을 펴기에도 편리한 곳이었으므로, 독립 투쟁을 하는 데에는 알맞은 지역이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선전 책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한 곳에 모아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였다. 비록 해외에 자리잡은 임시 정부였지만, 온 겨레의 지지를 받고, 또 국내외의 동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조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임시 정부는 연통제를 통하여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독립 신문을 발간하여 국내외의 동포에게 독립 운동의 소식을 알려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 독립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한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유럽과 미국에서의 외교 활동을 통해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히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더 부실합니다.
여러차례 개헌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4개의 정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물은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중학교에서는 아예 임시정부에 대한 내용 언급은 없고, 상하이 임시 정부라고 언급될 뿐입니다.
고등학교 국사가 상,하권으로 나눠져 있던 시기로, 상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역대 교과서 중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내용과 역사적 흐름이 기재가 되어있습니다. 연통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군요.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문제가 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
이륭양행, 백산상회 같은 이름도 언급이 됩니다.
언급되는 인물은, 김구, "김규식"입니다.
(4)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독립 운동의 중추 기구
국내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그 결과로 국외이긴 하나 상하이에 정통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1910년 이래의 정부 공백 상태를 메웠다는 의미에서 한민족이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회복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정부는 군주제를 벗어난 공화 정부로서, 민주 국가의 성격을 띠었으며, 민족 지도자들의 근대적 정치 의식이 확대되고, 새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제의 정부로서, 국내외의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임무를 담당해 나갔다.
임시 정부는 원래 1910년대 초에 수립될 듯하였으나 성립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3⋅1 운동 이후 여러 곳에서 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에서의 한성 정부, 시베리아의 대한 국민 의회, 서⋅북간도의 군정부 등 여러 갈래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전 민족을 이끌고 보다 강력한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정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 정부의 헌정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가 하나로 통합된 뒤,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근대적 임시 헌법을 갖추고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 정부는 임시 의정원과 국무원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민주 공화 정체의 정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 민국 임시 헌장 선포문
인민 일치(人民一致), 중외 협응(中外協應), 한성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 간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선언하고, 국민의 신의로써 완전히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히 자주 독립의 복리를 아(我) 자손 여민(子孫黎民)에게 세전하기 위하여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로써 임시 헌장을 선포함.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군주제 체제를 버리고 민주 국가의 공화제적 체제로 세워진 것은 1880년대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주창했던 개혁 정치의 염원이 이 시기에 와서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시 정부의 헌정적 지도 체제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 이후 5차에 걸친 개헌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제1차 개헌은 대통령 지도제로서 대통령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1925년, 이에 불합리한 점이 있어 제2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 지도제로 전환하였다가, 2년 뒤인 1927년에 제3차 개헌을 통하여 국무 위원 중심제인 집단 지도 체제로 변경한 후, 14년간 계속되었다. 그 뒤, 1940년에 제4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 중심제인 주석 지도 체제로 전환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다가 1944년에 제5차 개헌을 통하여 주석⋅부주석 중심 체제로 전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광복 운동의 전개
임시 정부는 그 초기에 전체 독립 운동자들의 동조를 얻지 못하여 국민 대표 회의가 소집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1925년에 김구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정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의 중국 침략에 따라 10여 차례에 걸쳐 중국 각지로 이동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빼앗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는 국내외를 연결하는 행정 체계로, 이것은 정통 정부의 기능을 발휘한 비밀 조직망이었다. 연통제의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 군감 등의 비밀 행정 조직이 만들어져, 한민족은 누구나 이 조직을 통하여 독립 운동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국내의 한국인은 이 조직을 통하여 임시 정부와 연락할 수 있었고, 군자금도 전달할 수 있었다.
군자금은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임시 정부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또, 애국 공채의 발행으로 모금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각지에서 독립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군에 전달되어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또, 임시 정부는 교통국의 통신망을 통하여 국내외를 연락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외교 총장으로 선임된 김규식을 전권 대사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또, 국제 연맹에의 호소나 태평양 회의에 국내외 국민의 독립 열망을 전달하는 운동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시켰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간행,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으며, 밖으로 한국의 자주성과 우월한 민족 문화를 인식시키고, 안으로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의 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4차 교육과정에 비해서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2차 보다는 훌륭합니다.
임시 정부의 활동
대한 민국(大韓民國) 임시 정부는 3⋅1 운동 중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1919. 4.). 이 사실은 한민족이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민족사적 정통성을 되찾으며, 국내외 독립 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을 구성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1 운동은 처음에 종교 단체와 교육 기관을 통하여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족 운동의 중개 역할을 하였을 뿐이며, 강력한 통일 조직을 가지지는 못하였다. 한편, 해외에서 추진되던 독립 운동도 지역마다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 발발 후에 수립된 임시 정부(臨時政府)의 명칭을 가진 것만도, 처음에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에서의 한성 정부, 시베리아에서의 노령 정부, 서⋅북간도에서의 군정부 등 여러 갈래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 민족을 이끌고 보다 강력한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하나의 정부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의 임시 정부를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립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임시 헌법을 갖추었고,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과 국무원(國務院)이 양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공화 정체(共和政體)의 정부였다.
대한 민국 임시 헌장 선포문
인민 일치(人民一致), 중외 협응(中外協應), 한성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 간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선언하고, 국민의 신의로써 완전히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히 자주 독립의 복리를 아(我) 자손 여민(子孫黎民)에게 세전하기 위하여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로써 임시 헌장을 선포함.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임시 정부와 국내 국민과의 연결은 연통제(連通制)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연통제는 전국의 도⋅군⋅면마다에 독판, 군감 등의 행정 조직을 정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이 제도는 모든 한국민으로 하여금 다 같이 독립 운동에 가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가령, 국내 국민은 이 조직을 통하여 임시 정부의 지시를 받을 수 있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 정부에 보냈던 것이다.
임시 정부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수합하고,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한편, 그 해 5월에는 외교 총장으로 선임된 김규식을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다. 그 후, 외교 활동에 주력하여 구미 위원부를 두어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시켰다. 또한, 임시 정부의 기관지로 독립 신문을 발행하고, 사료 편찬회를 두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일제의 침략사를 기술한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여, 밖으로 한국의 자주성을 선전하고 안으로 국민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2차에서의 언급은 단 두 줄이 전부입니다. 3차 교육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10여년간 이 당시에, 교육을 받았을 일제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해방 후에 태어난, 현재의 노년층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 이후세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지기 힘들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 6.25 이후에 집필된 교과서에는 당연히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있다고 되어 있으며, 당시 중국의 승인을 받았다는 언급이 되어있군요.
이 때 상해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었으며, 1921년에는 중국의 승인을 받았다. 해외로 망명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은 대개 중국의 상해⋅북경⋅천진(天津) 등지와 남북 만주⋅시베리아(Siberia)⋅미국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더욱이 남북 만주는, 뜻을 품고 고국을 떠나 망명(亡命)한 지사들의 피란처이며 활동 무대였다.
임시 정부에 대한 내용은 약간의 언급이 되어있을 뿐입니다만,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미 군정기에도 명확하게, "대한민국임시정부" 에 대한 언급이 되어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겠네요.
【임시 정부 수립】 이 사건을 기틀로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본부를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두고 끊임없이 내외와 연락하여 좋은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미운동은 비록 열국에 호소하여 독립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 각성에 큰 힘을 주었다. 언론, 종교계 등 모든 지식인은 민족 자립의 기초는 민족문화의 향상에 있음을 깨닫고 교육 진흥, 물산 장려 등의 운동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무단정치는 물러가고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이 총독으로 와서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고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약간 어루만지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식민지 정책이 변할 수 없어 여러 번 총독이 바뀌는 동안에 교육, 행정 등 모든 방면에 차차로 좀먹어 들기 시작하여 터무니없이 우리 겨레를 자기네에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우리 민족이 이 흉한 꾀에 넘어가지 않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교과서에 기록된 임시정부에 대한 기술은 긍정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안전한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사람들로부터 독립 자금을 받아내서, 끊임없이 분열하고 여러가지 자리만 만들고 정치놀음을 한 사람들로 묘사되었을 뿐입니다. 의미있는 성과를 낸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에 대한 묘사에는 "인물"이 빠져있습니다. 30년의 역사동안 피와 땀을 흘려 독립운동을 했던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임시정부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만 있었는가?
그리고 "연통제" 는 왜 그렇게 중요한건데?
1945년 12월 잡지에서 조사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설문조사입니다.
1위는 몽양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 우익, 박현영, 이관술 같은 좌익, 김일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당시에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최신 이념으로, 힙하고 쿨한 이념(?) 이었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국내에서 가장먼저 건국 준비를 한 것은 조선에 있던 몽양의 건준이었고 뒤를 이은 조선인민공화국이 굉장히 대중적인 지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에 대항하는 우익세력은 이에 대항할 정통성과 명분이 중요했고, 그러자면 1919년에 세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통제를 했으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급진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테고, 아마도 대한민국은 당시 보수 언론과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던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키워드로 신문을 검색해보면, 1945년 12월 이후로,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정부로 해야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사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문은, 기계적 중립은 아랑곳 없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 환영회, 대한민국정부 강령, 임시헌장 전문 등을 소개하며, 임시정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 당시,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으니, 새로운 이름과 개념의 우익세력의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있었다면 과연 살아남을수 있었을까? 언론과 지식인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당시 임시정부는 우익에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이고, 정통성의 상징이었겠지만, 1948년 정부출범 이후에는 화장실 갈때와 올때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을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는,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만 필요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었으며, 1921년에는 중국의 승인을 받았다. 해외로 망명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은 대개 중국의 상해⋅북경⋅천진(天津) 등지와 남북 만주⋅시베리아(Siberia)⋅미국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더욱이 남북 만주는, 뜻을 품고 고국을 떠나 망명(亡命)한 지사들의 피란처이며 활동 무대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기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항목 입니다. 완벽한 내용은 아닙니다만, 임시정부의 역사와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마르고 닳도록 설명한 "연통제"는 1919년에 실시하여, 1922년에는 조직이 붕괴되어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30 년 역사에서 2년 정도밖에 가동하지 못한 것입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17
교과서에서의 기록에 나와있는 내용은 실제 임시정부의 역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통제와 교통국같은 자금원이 붕괴(1922년) 되고, 독립의 여명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터널을 지나온 임시정부의 여정을 보면, 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생각이 듭니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탄핵되고, 하와이로 건너갔습니다.
반대로, 하와이에 있다가, 중국에 건너간 박용만은 무장 투쟁을 하다가 1928년에 사망합니다(밀정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치열하고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상하이가 조계지라고 한 들,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해외 유학처럼 편안했을까?
만보산 사건과, 조선땅에서 화교를 100명이상 살해한 화교배척사건 이후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입지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https://dprime.kr/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7188279
중국에서 일어난 한국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1931년, 1932년) 는 그동안 생각했던 대일 투쟁 의미 이상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가 아니라, 일본과 싸우고 있는 중국의 동지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힘든 기간동안,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점조직화 되기도 하고, 정당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놀랐던 것은, 지금은 전혀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던 임시정부의 이러한 상황또한, 20~30년대 신문에 실려있었고, 본국에서도 인지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예전 사람들은 흑백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 것 처럼 생각하지만, 당시에도 해가 뜨고 지고 신문이 배달되고, 기사를 읽고 정치와 시사를 논했던 것.
비록 몇 면 되지 않는 기사지만 당시에 신문을 읽던 사람들은 마치 우리나라 70~8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사속에 나오는 독립운동가들이 수배 되고 체포되고 재판 받는 기사를 보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1920년대~30년대 임시정부의 대안운동으로 제시되었던 유일당운동을 펼치던 김동삼씨가 체포되어 국내에서 공판받은 판결문들이 우리나라 신문에 전문이 실리는데.
이 판결문은,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인 혐의사실을 담고 있어, 판결문 전문이 수록된 신문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의 활약상을 합법적으로 묘사하고 전달하는 자료 역할을 했습니다.
김동삼(1878-1937)
1927년 김좌진, 지청천 등과 민족유일당촉진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이 되었다가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본군에 체포되어 강제송환되었다. 평양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현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이감되었다가 1937년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순국하였다. 이 당시 시신을 찾아가라고 형무소 측이 유족이나 지인들에게 통보하였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을까봐 누구도 나서지 못했으나, 바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소식을 듣고 와서 정중히 시신을 모셔가 장례를 치렀다.
이 분 들 외에도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시다 옥에 갖히거나 사망하신 독립운동가들은 엄청나게 많이 계십니다만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주로 1920년대에 활동하다가 30년대에 사살되거나 투옥되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이나 안창호 선생 등 몇 몇 분 뿐입니다
김동삼, 지청천 장군은 알려져 있지 않고, 김좌진 장군 , 안창호 선생은 유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알려져 있지 않은 분들이 덜 훌륭하다던가하는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해방이후에도 기억받게된 독립운동가 들은, 분명 그들을 기억한 누군가의 활발한 노력으로 인해 미디어의 선택을 받아 대중들에게 알려질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기회를 얻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지 않은 것 뿐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20~30년대에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은 2차대전과 해방 6.25를 거치면서 잊혀졌습니다.
해방 직후에, 영화화 하겠다는 보도가 난 김좌진 장군. 이후에 실제 영화화가 되었는지는 확인 된 바 없습니다.
1947년 경에 순국의 처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게 되고 교과서에 실린 유관순 열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의 범위를 좁게본다면 짧은 기간동안 활동했던 소수의 인물들만 볼 수 있지만, 폭 넓게 생각한다면, 일제 강점기동안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며, 해외에서 다양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모든 분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몽양 여운형 선생의 경우도 상해 임시정부의 인사이고,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으로 체포되고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찾아본 바로, 1930년대에 "대한민국" 이라는 키워드가 조선 신문에 언급된 것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판결문이 유일합니다.
이 판결문은 당시 동아일보에 이틀에 걸쳐 전문이 연재되는데요.
어떻게 보면, 경성법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몽양 선생의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서, 자서전을 정리해 준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판사가 팬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당시 머그샷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스타일리시한 분이셔서, 굉장히 저명한 인사이고, 조선 청년들 사이에서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실린 판결문 전문과, 보기 쉽게 책으로 나온 전문입니다.
심지어 3.1운동 보다 앞선 1918년부터 , 상해 임시정부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 판결문 이외에도, 몽양 선생의 재판기록과 조서등을 볼 수 있습니다.
원문 출처 : 몽향 아카이브
https://mongyang-archiv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