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자매 Mar 28. 2022

페트병의 추억

어릴 때 아빠는 속이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특히 아빠는 엄마랑 다툰 후 속이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나는 정말로 아빠가 나쁜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속이 아프다고 했다.

후에 위내시경을 해보니 ‘완전 정상’이셨다. 오히려 나와 언니가 만성 위염 진단을 받았고 그 후로는 속이 아프다는 아빠의 말은 정말이지 쏙 들어갔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빠는 식수 때문에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속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약수가 나오는 우리 학교 수돗가에서 물을 떠다 나르기에 이르렀다.

큰언니를 시작으로 넷째까지 그 물통을 이어받았더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다음 사람이 물통을 이어받게 되는 것이었지.

1.5리터 페트병을 양쪽에 들고 아빠의 식수를 매일 떠 날랐다.

생각해보면 참 힘든 일인데 군소리도 하지 않고 그 물을 매일 날랐다.

책가방도 무거웠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다 싶다(그래서 자매들 팔뚝이 남다른 것인가).


아이들이나 선생님의 발에 물통이 차여 교실 바닥에 나뒹굴 때가 있었다. 그럼 나는 텅텅 소리가 나는 그 물통을 주으러 일어났다가 다시 얌전에 내 자리 옆에 두었다.

아빠가 빚보증으로 우리 속을 썩일 때 그 물통을 들고 왔다 생각하니 아빠가 더 밉더라.

평생을 이기적으로 사시더니 가는 길만 이십 분씩 걸리는 그 길을 체중이 20kg도 나가지 않던 딸에게 그걸 시키다니 정말 인정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싶었다.

그래, 이제는 알아.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해 준 것만 기억하는 편파적인 기억력을 가졌다는 것을 말이야.


최근에 아빠가 길을 잃어 경찰차를 타고 집에 왔다고 한다.

그 좋은 기억력을 자랑하던 아빠가 치매에 왔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아빠는 지금도 매일 일기를 쓰고 꾸준히 신간을 읽는다.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언젠가는 좋아질 것만 같다.


그냥 아빠가 연기하는 것만 같다.

딸들에게 관심받고 싶어서 아빠가 지금 치매 연기를 하는 것만 같다.


컴컴한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날이다. 오늘이 그렇네.

그냥 숨고만 싶은 날이다.


갑자기 드는 생각.


아빠, 지금 어디 동굴에 들어가 계신 걸까.

우리가 아빠를 소리쳐 부르면 나와주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나 무서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