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쁨 받을 아이

좋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때

by 벨에포크
넌 어딜 가서도 예쁨 받을 아이야!

단지 누군가가 나에게 "넌 어디 가서 든 예쁨 받을 사람이야"라고 말해준 것으로 인해 난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예쁨을 받게 되었다. 그 사람은 어떤 신적인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예언가도 아니었다. 나와 1년여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내가 새로운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기에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내 걱정을 보듬어주는 말로써 했던 하나의 영혼 없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나에게 뭔가 운명처럼 자리 잡았다. 이 운명을 다른 단어로 대체하자면 팔자 같은 것이다. ‘넌 드센 팔자야’ ‘팔자가 세네’라는 말에서 쓰이는 그 팔자. 팔자, 운명, 복 이러한 것은 운이라는 한 부류에 속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수없이 많은 랜덤의 한 형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그런 기류, 느낌과 같은 것이다. '난 예쁨 받는 팔자를 타고났다'라고 이해하면 더 쉬울 것이다. 사실 내가 사교성이 굉장히 뛰어나고 누군가를 굉장히 배려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개인주의자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낯을 가리고 어색한 기류가 흐르게 되면 그 자리를 박차 나가고 싶고,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산해진미가 줄지어진 뷔페라 해도 어색한 사람과 단둘이 먹는다면 '그저 집에서 라면한젓가락 하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하다. 그런데 그냥 언제부턴가 어떤 단체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이 날 예뻐해 주었다. 물론 내가 외모가 뛰어나서 예뻐해 준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날 예뻐해 준 것은 단순히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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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에게 그랬다. “너는 인복이 많아”. 그래서 나는 인복이 많다고 믿었다.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이 항상 많다고 믿었다. 그래서 난 그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것은 내가 인복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난 예쁨을 받는 사람이야 라고 믿었더니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거라 믿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싫어한다라는 그런 피해망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날 싫어한다고? 그래 오케이. 그럼 그럼. 싫어할 수 있지. 이해해. 자 다음!” 이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날 좋아할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사람과의 만남에서 쿨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에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비치는 나의 모습일 어떨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내 모습에 대해 자신이 없다 보니 그런 나의 모습을 보는 타인의 시선에 무서움과 두려움이 숱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20대 초반 격렬하게 자아정체성의 시기를 지내고 나니 자존감이라는 것이 생겼고 자존감을 기반으로 인간관계가 다시 쓰였다. 그리고 한해 한 해가 지나면서 타인에게 관심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나도 이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적은데 타인이라고 해서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겠느냐.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어떤 단순 명쾌한 철학이 생겼달까?.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초월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비결은 내가 타인의 결함을 훔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쉽게 말해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이 개념이 바탕이 된 것이다. 내가 노란 머리를 싫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난 거리를 지나다니다가 노란 머리를 보면 친구들과 ‘저 노란 머리 봐봐. 너무 촌스럽지 않니?’라고 매번 흉을 보며 말하게 된다. 그럼 난 언젠가 갑자기 문뜩 생각들 들것이다. 내 갈색머리를 누가 욕하면 어쩌지? 나도 노란 머리가 싫은 것처럼 남들도 내 어떤 부분이 싫겠지? 내가 뚱뚱한 것을 보고 욕하면 어쩌지? 내 패션을 보고 흉보면 어쩌지? 이런 식으로 내가 누군가의 결함을 콕 집어서 지인과 뒷말을 하다 보면 나도 그 뒷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시선에서 벗어나려면 나부터 이런 시선을 갖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단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면 타인도 내 단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도 점차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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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좋은 시선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생각은 자신의 예상보다 많은 것들에서 드러나고 또 그렇게 나타나게 된 2차원 또는 3차원 적인 형태는 또 어떤 생각을 되돌려준다. 하나의 circle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우화가 있다.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읽었던 우화였다. 토끼가 어떤 쓰레기를 버렸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새한테 가고 또 그게 물고기에게 가고 또 그게 어떻게 흘러가고 어떤 순환을 거쳐서 결국 토끼에서 다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즉 옛 어른들이 말하는 “ 네가 뱉은 말은 다시 너에게 돌아온다 “ 이것과 같은 맥락의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 나는 이 동화가 꽤나 내게 큰 충격을 주어서 그때 당시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니면서 남을 험담하기를 일삼았던 초등학생의 못된 나에게 큰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험담하는 짓을 그만두고 그 이후에 내게 찾아오는 친구들과의 갈등은 내가 이전에 했던 못된 행동들로 인해 되갚아진 것이라고 믿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윤회사상과 같은 비슷한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든 것은 순환된다 라는 것. 그래서 나쁜 생각, 나쁜 말들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비수처럼 나쁜 말들을 듣게 되고 좋은 생각, 좋은 말들은 결국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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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그래서 실제가 되었을까? 내 전 직장에서는 나보다 윗년차에 있는 선 새님들은 나를 정말 예뻐라 해주었다. 장난도 치고 모르는 게 있으면 항상 도와주고 사적으로 약속을 잡았다. 왜 그들은 내게 잘해주는 걸까? 처음엔 그렇지 않았었는데. 물론 나이가 한 살 차이나다 보니 서로 경험하는 것에 격차가 적고 살아왔던 문화나 시대가 같았기 때문에 공감대가 많이 형성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의아한 건 10년 정도 차이나는 사람들, 또는 그 이상의 상사들도 나를 잘 케어해준다. 그들은 왜 그럴까? 한 사람은 내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보여서 그렇다고 했다. 내 인상이 좋다는 소리는 어디 가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만난 것 같은 얼굴이라서 날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또 한 사람은 내가 한참 퇴직 고민을 할 때 나와 면담을 했었는데 내 성격이 순하다면서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전에 표독스러운 사람들이 많았었나? 중 간년 차선생님들은 윗 기수 선생님들이 나를 좋게 말해주면서 서로 교류가 쌓이게 되었고 같이 만남을 가지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관계가 거의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서 서로 이야기를 해보니 말이 잘 맞고 쿵작 이 잘 맞고 달리 보이고 오해가 풀리면서 친해지게 된다. 내가 나 혼자만의 착각으로 과장되게 예쁨 받는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근데 뭐 내가 그렇게 과장되게 생각한다 해서 마이너스가 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기에 난 나의 그 과장성을 밀어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생각한다. 아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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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딜 가서도 예쁨 받을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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