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테드 창 - 숨)
나는 단기 기억은 좋은 반면, 장기기억은 좋지 않다. 그래서 가끔씩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과거의 일을 떠올릴 때면 우리 반에 있던 아이들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단기 기억은 꽤 좋은 편이어서 방대한 양을 암기해서 단기간에 쏟아내는 일은 곧잘 하는 편인다.
만약 내가 나의 모든 일들을 모조리 기억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몇 주 전에 친구가 내 돈을 빌려갔다가 갚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던지, 며칠 전에 읽었던 500페이지짜리의 책 내용이 생생히 기억이 남는다던지, 시험을 하루 앞두고 교과서를 그저 한번 읽었을 뿐인데 그 내용을 다 기억하고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던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서 정보를 찾아내는 일의 노력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수고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수고의 카테고리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은, 잊고 싶은 것들도 잊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들이 잊히지 않고 언제든 내 기억 파일에서 불러올 수 있게 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처럼, 내가 잊고 싶은 기억들이 불러오고 싶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 반짝하고 띄워지는 팝업창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면 나는 표본에 좀 못 미치는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여전히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모든 사실을 그 자체로 인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존재한다.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가 있다.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정교한 장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장치는 경험의 대부분을 버리고, 고르고 고른 몇 가지 표본만 간직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본 영화, 우리가 읽은 소설, 우리가 들은 연설, 우리가 음미한 몽상의 파편들과 뒤섞는다. 그런 다음 뒤범벅 속에서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일관되어 보이는 이야기를 짜낸다"
(유발 하라리 - 호모 데우스)
내가 인지하는 나는 과거의 기록 자체인 cctv의 평균값이 아니다. 그 cctv를 편집하고 각색하여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예능 등 어느 한 장르로 잘 짜 맞춰놓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의 정보를 기반으로 한 나를 '나'라고 인지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자아와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장르의 이야기일까?
이 질문을 어디선가 받았을 때, 나는 하나의 '기승전결'이 끝난 주인공의 이야기 같다고 답했었다. 지금의 나는 안정기에 들어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아정체성을 찾느라 혼돈의 카오스를 회오리처럼 겪고, 절정에 다다르고, 다른 길을 모색하고, 그리고 지금 나의 길을 찾아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안정기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1막이 끝난 것이다. 이제 2막을 시작해야 할 때다. 그래서 2막을 어떻게 짜야할까 고민하는, 작가가 다음 각본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나는 있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 속의 작가는 마감에 쫓기지도 않고 그저 원하는 대로 다양한 것들에 귀 기울이며 다채로운 경험을 한다. 그래서 최근의 나는 대체로 만족스럽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즘 나의 직장이 매우 바빴기 때문에, 나는 기존의 업무에서 더 부과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의 시간이 줄어든 것에 대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현재의 나는 그 과정을 잔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스트레스가 오는 상황에서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들과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들도 만족스럽다. 신체와 정신도 건강하게 잘 유지되고 있다. 내가 뛰고자 하면 뛸 수 있고, 지식을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있고, 대화가 필요할 때는 깊게 파고드는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어떤 삶을 살아가면 좋을까?라고 고민했을 때, 나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줄 수 있는 직업,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내 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 장애물이 없는 직업, 그리고 그 일 자체가 악하지 않은 직업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삶의 패턴을 만들어 주는 균형 있는 삶을 원했다. 지금은 그 균형을 내가 잘 컨트롤하면서 지켜내고 있다. 물론 나도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힘든 일을 겪기도 한다. 한 달 전에는 감정적으로 너무 많이 화가 나기도 했었다. 원체 화가 많이 없는 편인데, 최근에 내가 그렇게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이런 불쾌한 감정, 신체적인 불균형, 계속되는 야근의 상황들이 있어도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뭔가 성숙해졌다. 나는 지금 내가 성숙해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인지한다.
<Olafur Eliasson - Rainbow Assembly >
올라퍼 엘리아슨는 비가 내리는 상황을 설치미술로 표현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물이 안개처럼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빛에 의해 무지개의 형태가 보인다. 관객은 우산을 쓰고 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물의 입자가 내 모든 경험의 실체인 기억의 데이터라고 할 때, 그 기억의 데이터들은 빛이라는 물질을 통해 무지개의 형태로 인식된다. 그저 나는 물의 입자들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집할일 뿐이지만 나는 나를 색이 잘 배열된 무지개로 인식한다. 내가 어떤 각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무지개의 색 배열이 달라질 수도, 그중 어떤 색을 나의 main color로 설정할지, 그리고 그 형태를 직선으로 할지, 곡선으로 할지, 원형으로 할지는 나의 관점에 달려있다. 나의 데이터들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는 가에 따라 '인지된 나'는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 물론 그 폭이 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기억의 데이터들의 집합인 물의 입자 안으로 우산을 쓰고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날것의 cctv를 마주할 수 있을까?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그 장면을 직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방어기제도 작용되지 않는 공간에서 적나라한 나의 기억들을 마주하고 나왔을 때 나는 다시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그 무지개는 어떤 색으로 배열되어 있을까?
이 질문들에 나는 우산을 쓰고 그 안으로 들어갈 자신은 없다고 대답하겠다. 내가 바라보는 무지개가 너무나도 균형 있게 색이 배열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내게 삭제되었으면 하는 장면들을 고스란히 HD 화질로 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내가 두렵다고 느끼는 이유는 진실된 '나'와 인지하는 '나'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피라는 방어기제를 쓰면서 리셋시켜버린 기억들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ted chiang - exhalation)
그저 cctv가 영화관에서 방영된다면 그것을 보기 위해 영화표를 예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그저 시간의 흐름만을 담고 있을 뿐, 그 카메라가 사건의 감정적 차원은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경험의 데이터를 잘 편집해서 '나'라는 작품을 만들어 이 세계와 교류한다. 사건을 경험하고 그것에 감정을 덧씌워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들이 축적되어 '나'라는 인격을 형성한다.
그러나 색이 잘 배열된 무지개가 보인다고 해서 잘 형성된 인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인지하는 자아가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을 성공적으로 숨겨왔을 수도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과거의 여러 시점에서 틀린 적이 있고, 잔인했거나 위선적으로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일들 대부분을 망각한다. 바꿔 말해,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 거의 모른다... 리멤(모든 사실을 기록하는 장치)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제공해주는 한, 나의 자아상이 진실에서 너무 멀어지는 사태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 진실한 기록으로 바꿔주기를 희망한다.
(ted chiang - exhalation)
우산 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