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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에포크 Feb 17. 2022

예민한 사람의 장 트러블

8시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떴다. 충전되어 있는 핸드폰을 보니 7시 54분이다. 어젯밤 일찍 잠에 든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일어난 것은 배가 아팠기 때문이다. 요즘 계속 소화기관이 좋지 않다. 저번 주에 어떤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배가 갑자기 아파 화장실을 갔다. 볼일은 보고 난 후에도 계속 배는 빵빵하게 불러서 소화가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된장찌개를 끓여먹었는데 그 이후로 탈이 났다.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르는 겨울 애호박을 야심 차게 2천 원이나 주고 샀건만. 애호박을 다 넣어버리는 게 아니었다. 반만 넣을걸. 전 날 구워 먹고 남은 소고기를 넣어 끓인 것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소고기는 오빠 회사에서 설 선물로 엄마 집으로 배달된 것이었다. 엄마는 이 소고기를 김치냉장고에 잘 넣어놨고 한판은 가족들과 설에 구워 먹었고, 한판은 남아 김치냉장고에 일주일 넘게 자리하고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겠다는 나에게 엄마는 각종 반찬과 소고기도 같이 넣었고, 괜찮겠지 라는 생각에 아이스팩 없이 캐리어 한구석에 넣어졌다. 캐리어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고, 김포공항에서 일산으로 다시 차로 이동하여 우리 집 냉장고에 비로소 도착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고기를 구워 먹었고, 남은 고기를 냉장고에 다시 넣었다가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넣은 것이다. 배가 아프게 한 원인은 아무래도 오랜 기간 동안 실온과 냉장을 반복한 소고기가 유력했다. 


하루 종일 속이 좋지 않았다. 된장찌개 냄새만 맡아도 울렁거렸다. 나는 냄비 한가득 끓인 소고기 된장찌개를 버렸다. 그렇게 그다음 날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죽만 먹었다. 속은 계속 멀미하듯 울렁거렸다. 하루 종일 바이킹을 타고 있는 듯했다. 그다음 날은 위에서 장으로 넘어갔는지 배가 아팠다. 배는 가스가 차서 딴딴해져 있었고 배를 누르면 가스에 압력이 가해져 통증을 느꼈다. 화장실을 가고 약국에서 장염 약을 사다가 먹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하루씩 지나가면서 상태가 점점 좋아졌지만 조금 활동을 하면 식은땀이 나고는 했다. 날이 갈수록 건강을 점점 되찾았지만 가스가 계속 찼다. 방구쟁이가 되었다. 한 시간에 5번은 방귀가 나오는 듯했다. 집에 혼자 있어 망정이지 사무실에 있었다면 가스를 참느라 더 배가 더 아팠을 것이다. 


나는 원래도 장이 좋지 않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예민해서 우리 집이 아니면 큰일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가 일찍 마쳐 지장이 없었으나 중학교를 가면서 문제가 되었다. 학교에서 배가 아프면 큰일이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그 많은 아이들이 모두 다 교실에서 빠져나와 복도며 화장실이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을 가는 것은 무리였다. 친구들이 화장실에 줄 서 있는데 한 칸을 차지해서 볼일을 본다는 내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한동안 소리가 나고 냄새가 나는 그 화장실 칸에서 아이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문을 열고 나온다는 것은, 내가 큰 일을 보았다는 것임을 모두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예민한 10대에게 그 과정은 다른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죽어도 학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수 없었다. 그건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리현상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야속하게도 내 배에서는 화장실을 가라는 신호를 보내기 일수였고, 어떤 날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무시할 수 있었지만, 어떤 날은 호흡 조절은 무슨 괄약근에 아무리 힘을 주어 버텨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서 참기 어려운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배가 아프다며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아프다며 조퇴를 했다. 조퇴를 하고 우리 집에 도착해야지만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러나 조퇴는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든 학교에서든 조퇴는 가끔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기에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솔직함이라는 카드를 썼다. 배가 아프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선생님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못 가겠어요. 빨리 집에 다녀와도 될까요?" 솔직함은 가끔 가장 큰 무기다. 선생님은 나의 장트러블과 예민함을 이해해주었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다녀오고는 했다. 그래도 중학생 때는 통학을 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무사히 잘 지나갈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더 큰 어려움이 생겼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오빠가 다니고 있는 옆 도시에 있는 학교로 입학을 했고,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숙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에 간다는 것은 기숙사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나는 친구들이 다 자고 있는 밤 시간대에 화장실을 이용했다. 기숙사다 보니 자연스러운 배변활동을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했지만 나는 아직도 용기가 부족했다. 아직도 나의 은밀한 냄새와 소리를 친구들에게 오픈하고 싶지 않았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 칸에서 나오는 사람이 '나' 일수는 없었다. 아직 그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 화장실을 가야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때 화장실을 갔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내 괄약근이 정상적으로 운동하지 않고 멈춰버렸다. 배변을 조절해야 할 센서가 소리가 나면 멈춰버리는 센서가 된 것이다. 나는 입학하고 나서 바로 변비에 걸렸다. 화장실을 제대로 갈 수 없었으니 당연히 찾아올 변비였다. 친구들이 자는 밤에 화장실을 가야 했으니, 배에서 신호가 올 때 제때 화장실을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동안 너무 고생을 해서 엄마는 화장실을 직빵으로 갈 수 있는 마법의 가루를 구해주었다. 마법의 가루는 물에 조금 타 먹으면 조금 있으면 바로 신호가 왔다. 그때에 맞춰 나는 야자시간에 몰래 기숙사로 들어가 화장실에 갔다. 다들 학교에 있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해결해야만 하는 힘겨운 기숙사 생활을 보냈다. 그래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율학습이 많아졌기에 내 화장실 생활도 점점 나아졌다. 자율학습이 많아진다는 것은 쉬는 시간이 아니어도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아닌 선생님 전용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거기엔 아이들이 없었으므로. 그 누구도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완전범죄처럼 말이다. 


성인이 되면서 이제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었고 나의 예민함도 다행스럽게 점점 둔해졌다.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일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한 상황들이 많았기에 이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뻔뻔해진다는 말은 맞았다. "내가 화장실 가겠다는데 뭐 어쩌라고"라는 마인드가 탑재되어 이제 우리 집이 아니어도 화장실을 잘 갈 수 있게 되었다. 공중화장실도 잘 가고 복합 문화공간에 있는 화장실도 잘 갈 수 있다. 그래도 나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이 있었다. 아직 남자 친구네 집에 있는 화장실은 잘 못 간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나의 방귀소리가 에코가 많은 화장실에 널리 퍼져 벽을 뚫고 그 작고 조용한 원룸에 들리는 게 여간 곤욕스러울 수 없다. 나도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은데 이놈의 장은 버블티처럼 가스를 버블버블 만들어내고 배에 압력을 가해 힘을 줄 때면 가스가 이때다 싶어 세상에 나온다. 그것도 요란하게.


하, 신혼집은 다른 건 필요 없고 화장실은 2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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