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briantracy.com)
크게 열린 마음으로 당신 마음의 경계선을 지워라!
세상은 가히 무한히 넓어, 무한히 많은 사람들을 사귈 수 있고, 그것도 당신과 케미가 잘 맞는 사람 위주로만 사귀어도 당신의 생이 턱없이 짧기만 할 것이다.
과연, 당신이 만나도 만나도, 수많은 인연들을 다 만나지 못할 것이며, 구경하고 또 구경해도 턱없이 부족하고 좁은 시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아주 많은 것들을 섭렵하고 또 섭렵하여도, 캐내고 계속 또 캐내어도 당신이 미칠 수 있는 시야는, 당신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과연 많은 것을 탐구해 내고, 엄청나게 많은 것을 개척해 내어도, 그 끝은 아주 까마득할 것이며, 결코 보이지도 않는다.
만약 당신이 많은 것을 해 내었다고 느끼고, 또 그렇게 스스로 자부한다면, 그것은 그저 당신만의 착각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세상은 또한 무한히 높아, 당신이 아무리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과연 끝이 없을 것이다.
자기 맡은 바, 일이나 특정 분야에 있어서도, 초심자가 담당자가 되고, 담당자가 관리자가 되고, 관리자가 전문가가 되고, 전문가는 이른바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기 좋게 말하여 '최고의 반열'인 것이지, 세상 그 어디에도 최고의 반열 같은 것은 없다.
최고의 위에는 항상 또 다른 최고가, 떡하니 버티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또한, 세상의 모습은 무한히 길기만 하다.
인류의 긴 역사 혹은 이 땅의 유구한 역사에 비하면, 당신의 생(生)은 점 하나로고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나마, 우리가 과거에 이미 지나온 내력에 대해서는 고고학, 역사학 등을 통해 어떻게든 다소 접해볼 수 있겠지만, 앞으로 뻗어나갈 그 미래의 끝점을 누가 감히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있어 감히 어림잡을 수 조차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아주 넓고도 높고도 길기만 한 세상 속에 잠시 동안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의 문마저 자물쇠로 꽁꽁 걸어 잠그고 살아간다면, 이 얼마나 아쉬울 것인가?
과연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이렇게 넓디넓고, 높디높고, 길디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의 문이라도 활짝 열려 있어야, 자기 가슴속 상상의 문이라도 활짝 열려 있어야, 그나마 작은 돌파구라도 좀 만들어 내어 볼 수 있을 터인데, 이마저도 안 된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디, 자기 마음의 문을 아주 크게 열어, 이 광활한 세상에 보다 많은 것을 시도해 보고, 많은 도전도 해 보아야, 네 나중에라도 결코 후회가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 마음의 경계선을 완전히 없애어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어떤 회한도, 그 어떠한 아쉬움의 감정도 최대한 없앨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 여기서, 이렇게 자기 마음의 문을 크게 열어젖히려면, 자기 마음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려면, 그래서 아무런 아쉬움 없는 생(生)을 잘 살아내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자기 마음의 턱을 크게 낮추어라.
우리가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히 자기 마음의 문턱을 최대한 한번 낮추어 보아야 하겠다.
그 턱을 아예 없앨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그게 어렵다면, 최대한 낮추도록 한번 해 보아라.
예를 들어, 세상에는 온갖 텃새들로 가득하다.
가장 텃새가 적을 것 같은 종교 시설이나, 교육 시설이나, 사회적 복지시설 등에서 마저도 여전히 텃세가 엄청나게 존재한다.
텃새란 먼저 한 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권리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이 거기에 진입하려는 자들을 배타적으로 밀쳐내려고 하는 성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텃새적 심리가 일종의 카르텔(담합)과 연계하면, 그 세력이 더욱 커진다.
즉, 텃새와 카트텔이 뒤섞여 아주 혼잡한 형태로 자기 주위에 문턱이나 울타리를 크게 쳐서, 아무나 거기에 쉽게 들어와서 자기네들의 잇권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텃새나 카르텔은 당신을 더욱더 위험하게 하고, 당신의 안목을 매우 좁게 하거나, 아예 막아버릴 수가 있어서, 당신에게 알게 모르게 아주 큰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가령, 도둑을 막으려고 울타리를 매우 높였더니,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도 적어지고 위화감만 커져가고, 그렇다고 하여 도둑들이 없어지지도 않는 격과 유사하게 비교될 수 있겠다.
또한, 잡상인을 막기 위해 혹은 보안을 위해 행사장의 출입을 너무 엄격히 관리하였더니, 너무 경계가 심하고, 진입장벽이 높아서 일반인들의 참석이 점차 적어지게 되어, 결국 행사의 흥행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과도 유사한 경우라고 하겠다.
과거 중국의 한나라 초기 ‘소하(蕭何)’는 자기 집 울타리를 아예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나라의 재산을 빼돌릴지 모른다고 의심을 하고 있는 주변 정치인들의 시선을 무력화해 버렸으며, 늘 생활 전반을 아주 검소하고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니, 황제나 제후들을 포함한 실세들의 오해를 거의 받지 않을 수 있었고, 항상 이웃과 많은 것을 나누어 먹으며 살아가다 보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변으로부터 존경의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사상 자기 생의 끝까지 권좌에서 쫓겨나지 않고, 큰 탈 없이 영화를 누렸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며, 자기 자식들 마저도, 당시 권세가들의 경계를 거의 받지 않아서,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하에 비유할 수 있는 조선의 인물로는 단연 황희(黃喜)를 들 수 있다. 황희는 배려심과 관용의 정치인으로서, 그의 정치적 조정 능력은 아주 탁월하였다.
또, 그는 매우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소신도 강하여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 반대로 인한 유배, 수차례의 직언으로 인한 파직, 청탁과 뇌물 등으로 인한 투옥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의 정치 능력이나 조정 능력은 가히 소하에 견줄 만하다.
그 일례로, 황희의 집에 사내 종아이가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한 아이의 재주가 아주 탁월했다고 한다.
황희는 신분의 턱을 없애어 그 아이를 면천시키고, 큰 인물이 되라고 격려하며,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주어 내보냈는데, 10여 년 후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어느 날, 한 젊은이가 황희에게 큰절을 올리길래, 자세히 보니 예전에 면천을 해준 그 아이였다.
당시 황희는 그 아이의 과거(천민이라는 신분)를 소문내려 하는 주위 사람들의 입을 막기까지 해 주었다고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신분이 노출되어, 장래에 지장이 있을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황희가 신분의 턱을 크게 없앤 것은, 한 젊은이가 조선 신분제도의 한계를 벗어나 훨훨 승승장구하기를 바라는 큰 어른으로서의 행보였다고 평하지 아니할 수 없겠다.
이는, 오로지 황희가 엄청나게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자, 천민을 당연히 하대하려는 자기 마음의 경계선을 완전히 허물어낼 수 있었던 큰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겠다.
조선 세도정치의 예를 한번 살펴보자.
조선의 세도정치는 아마 조선 멸망에 큰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세도정치의 실세들은 자기네들 가족이나 일가친척의 이익을 위해 정치의 턱을 크게 높이고 온갖 잇권에 대해 독식을 일삼았는데,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나라를 위해 의미 있는 큰 일, 가치 있는 업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자기네들만의 족보와 치적에만 몰두하는 지극히 소인배들의 정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당시의 왕조시대에, 나라의 임금들이 별로 힘이 없었고, 나라의 건전한 정치 시스템이 무너져있는 시기였으니, 이들이 정치를 아예 송두리째 독식할 수 있는 토대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개인이나 가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나라를 망쳐먹은 세도정치의 수혜자들에게 면죄부가 가능한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둘째, 위선을 철저히 없애라.
자기 마음속에, 위선적 요소가 많이 들어앉아 있게 되면, 자기 속마음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기도 하고, 뭔가 디테일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서,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매우 피하려 하고, 매사 소극적으로 변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자기 마음을 완전히 걸어 잠가버리게 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말도 아주 잘하고, 마음도 많이 열어놓은 것 같아도, 그것은 철저히 자기의 위선을 관철하기 위한 범위 내에서만, 자기 거짓을 숨기기 위한 목적의 범위 내에서만, 그러할 것이다.
이 위선은 자신을 늘 가식적이게 만들고, 거짓되게도 만들며, 결국 자기 생의 전반을 아주 헛되게 만들어 버리게 된다.
사람에게 모순보다 더 심각한 것이 거짓일 것이며, 거짓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 바로 위선이다.
그런데 사실, 그 누구나 과연 위선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기 마음속에서, 이러한 위선을 철저히 잘 지워내어야, 비로소 자기 인격을 아주 반듯하게 할 수가 있다.
가령, 여러 매체를 통해, 상대 정치인의 성비위, 뇌물수수 등에 대해 저격수 역할을 자처하던 사람이, 자신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불거지거나 고발을 당했을 때에는, 얼굴색 하나도 안 바꾸고, 절대 시인하지 않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내로남불의 극치라고도 볼 수 있겠다.
SNS나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해 남의 신상 털기를 일삼는 자들도 많다.
이들 또한 자기네들의 범법적 댓글이나 불법 영상이 탄로 나거나 고발당하면, 가차 없이 아주 선한 양의 모습 혹은 피해자의 코스프레로 돌변한다.
또, 혹세무민을 일삼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세상을 미혹하게 하여 마구 어지럽히고, 심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꾀어 온갖 이익을 갈취하거나 착복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도 그 진실이 들통나거나, 매체 등에 고발되기라도 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순진하고 선량한 피해자의 입장으로 돌변하곤 한다.
그야말로, 위선의 최고봉이라고도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여불위는 당시 실세들을 돈으로 꾀어, 자신이 다루기 좋은 장양왕을 왕으로 세우고, 이 장양왕에게 자신의 애를 가진 조씨(조희)를 바쳐서 후궁이 되게 하였고, 이 애가 태어나고 자라나서 그 무시무시한 ‘진시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탁란 현상(뻐꾸기가 종다리 둥지에 몰래 알을 낳거나, 두견이가 휘파람새의 둥우리에 몰래 알을 낳아서, 종다리나 휘파람새 어미에 의해 자기네 새끼가 공짜로 길러지게 하는 행동 등을 말하며, 이 경우에 대개는 원래의 종다리 새끼와 휘파람새 새끼들은 둥지 밖으로 떠밀려 떨어지게 되어 죽음을 맞이함)이 여기서도 가차 없이 발생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이화접목(移花接木)’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꽃이 핀 나무를 다른 나무에 접붙임(남모르게 교묘한 수단으로 몰래 무엇을 뒤바꾼다는 의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국시대 4군자(당대의 유력 정치가)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춘신군이 초나라의 고열왕이 후사가 없자, 자신의 아이를 가진 이언(춘신군이 정치적으로 결탁한 이원의 여동생)을 고열왕의 후궁으로 보냈고, 이렇게 하여 태어난 아이, 즉 춘신군의 친아들이 초나라의 태자가 되어, 나중에 추유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참으로 어이가 없는 역사의 막장 드라마들일 것이며, 적나라한 위선 혹은 혹세무민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셋째, 무엇이든 속단은 금물이다.
우리가 무엇에든 너무 쉽게 판단해버리거나, 섣불리 속단해 버리게 되면, 서로 간에 오해가 쌓여가기 쉽고, 그 결과 점차 믿음이 깨어지게 되고, 결국 마음을 닫아버리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좋은 인간관계를 상승적으로 잘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에든 속단이나 오해는 아주 금물이라고 하겠다.
설령, 어떤 오해할 만한 일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속단하지 말고, 천천히 시간을 두고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의심한 바가 확실하게 모두 밝혀지기 이전에, 단지 의심만을 가지고서 절대 상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즉,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지기 이전에는, 일단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는 의미이다.
‘개관사시정(蓋棺事始定)’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관을 덮어야 비로소 모든 일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른바, 시체를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덮은 뒤에, 즉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경험적으로, 누구나 보기에도 잘 될 것 같고 분명히 출세할 것 같았던 사람이 나중에 가난하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누구나 보기에도 형편없었던 사람이 나중에 큰 부자가 되어있거나, 큰 유명인이 된 경우를 종종 보았을 것이다.
또한, 천하의 재벌이나, 유명인들 중에서도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지거나, 잊혀가는 모습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들 보아왔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나라 대표 시인 격인 두보(杜甫)는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는 친구의 동생에게 보내준 시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길가에 버려진 낡은 연못도 옛날에는 그 속에 용(龍)이 들어 있었고, 오래전에 썩어 넘어진 오동나무가 백 년 뒤에는 아주 값비싼 거문고 재료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네!
사람은 죽어 땅에 묻힌 뒤가 아니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그대는 아직 매우 젊지 않은가?”
또한, 맹자(孟子)가 말한 ‘권연후지경중 탁연후지장단(權然後知輕重 度然後知長短)’이라는 말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 문구는 아래와 같은 뜻이다.
“무게를 제대로 달아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의 무게가 가벼운지, 무거운지를 알 수 있고, 길이를 한번 재어보아야 그것이 길고 짧은 지를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사실 관계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미리 속단하여, 상대에 대한 신뢰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제대로 한번 그 신뢰를 지켜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런 게 바로, 믿음과 불신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활짝 열려진 참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고 작은 여러 일에 대해서,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고, 항상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열린 자세가 참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넷째, 대가를 무한한 기대감으로 바꾸어라.
살아가며 무엇에든, 그 대가를 바라고서, 혹은 누가 자기 선행을 알아보아주기를 은근히 바라서, 좋은 일을 했다면, 이미 자신의 선행은 모두 정산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즉, 오른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에서 이미 당신은 그 보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니, 나중에 당신의 선행이 주변에 두루 알려지든 아니든 간에, 상호 정산이 끝나버린 것이나 진배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차라리, 당신의 크고 작은 선행에 대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서, 그저 당연한 듯이 행하는 습관을 한번 들여보면 어떨까?
이렇게 되면, 그 선행이 일으킬 수 있는 미래의 여러 가능성이 아주 크게 열려있는 상태가 될 것이니, 당신 마음속에는 늘 기대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즉, 당신이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았고, 그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조차 마다하였으니, 이는 아직 당신의 선행에 대한 정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므로, 앞으로 그 선행이 일으킬 수 있는 파장과 엄청난 일들에 대한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당신의 선행은, 그 결과의 크기에 무관하게, 무한한 감동을 자아낼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선행의 당사자가 구태여 자기 자랑을 크게 떠벌리게 되어 당신이 결국 알게 된 선행과 그 선행의 당사자는 구태여 소문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전혀 감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우연히 그 사실을 직면하게 된 선행은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 선행이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때로는 정말 제대로 된 선행인지에 대해서 의심까지 들 수 있겠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실제의 선행의 크기보다 훨씬 더 무게가 있고,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든 대가 없이 행하는 선행이 결국은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으로도 잘 연결될 수 있다.
즉, 아무런 대가 없는 실천은 아직 그 실천에 대한 대가가 정산되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으므로, 언젠가는 큰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잠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 기대감은, 마치 두둑한 복리이자와 같이, 미래의 어느 날 당신 곁에 엄청난 모습으로 다시 현현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이치는 자연의 당연한 순방향의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세상 이치의 자연 회복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다섯째, 자기 고집을 바로바로 꺾어라.
항상 자기 고집을 잘 꺾을 수 있어라.
대신 자신감은 아주 크게 지녀 보아라.
고집을 부린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닫힌 것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고, 그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런 고집 없이도, 논리적으로 혹은 인품적으로 이길 수 있는 그만한 배포쯤은 당신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줄곧 스스로의 인품과 성품을 잘 어루만져 온 당신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한번 크게 가져보아라.
또한, 마음이 열리려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려면, 그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전혀 고집을 부리지 않고도 혹은 항상 양보하는 듯하면서도,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지속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자신감이 별로 없다면, 매우 부족한 상태라면, 그 누가 자기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힐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경우라면, 아마 자기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기 바쁠 것이다.
알량한 자기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알량한 자기 고집을 마구 사수하기 위해, 상대를 대적하기가 너무 두려워서, 자기 마음의 문을 최대한 걸어 잠그려고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꽉 닫힌 그 공간 안에 무엇을 과연 더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완전히 닫힌 그릇 속에 더 이상 그 무엇이 더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뚜껑이 닫힌 양동이가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듯이, 당신의 닫혀진 마음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넓은 세상에, 아주 귀한 사람들을 두로 사귈 수 있기 위해,
이 세상을 제대로 한번 음미해 보기 위해,
이 찬란한 세상을 제대로 한번 구경해 보기 위해,
가장 우선적인 것 중 하나가 자기 고집을 철저히 억제해 내는 일일 것이다.
대신, 당신의 굳은 자신감으로, 큰 용기로서 그것을 한번 대신하여 보아라.
당신에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절대 고집부리지 말고서,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바로 사과하여라.
과연 어설픈 논리나 말도 안 되는 고집과 아집이거들랑, 스스로 바로바로 꺾을 수 있어라.
항상 큰 가슴으로, 크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맞아라.
지금까지, 자기 마음의 경계선을 완전히 허물어, 모든 것을 아주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좀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좋은 방책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주의할 점이 좀 있다.
그것은 바로, 너무 자기 능력 이상으로 자기 모든 것을 오픈하게 되면, 자칫 스스로 다치기도 쉽다는 점이다.
모두들 인정하겠지만, 세상에는 선량한 사람 이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즉, 당신이 선의로서 웬만한 것들을 모두 오픈하여 주었는데, 상대는 이를 역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하거나, 나중에 자신이 궁해졌을 때에는 당신을 역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다.
그러니, 항상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오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스스로 자신감만 확실히 있다면, 보다 많은 것을 활짝 오픈해 주는 것이 참으로 좋은 모습이겠지만, 혹여 자신의 내공이 아직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많은 것을 오픈해 주는 것은 자칫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문제이다.
구체적으로는, 당신이 오픈하는 말의 내용이나 성격이 당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 말수조차도, 그것이 가벼운 잡담이나 사교성 발언이 아니라면, 필요 이상으로 많을 필요는 전혀 없겠다.
결론적으로,
사실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이 충분히 자신을 타락하기 좋은 쪽으로 형성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위선에 빠지기 쉽고, 누구나 고집과 아집으로 점철된 아주 못난 인격이 되어버리기도 쉽고, 그래서 자신을 아주 작은 방에 가두어버리게 되기도 쉽다.
따라서, 자기 인격에서 이러한 위선을 실시간 잘 제어해 내고, 심리적으로도 절대 어두운 단칸방에 스스로를 오래 가두어두지 말고서, 항상 크게 열린 마음을 지속해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래서, 스스로의 참마음을 제대로 완성해 나가려면, 그 옛날 은나라 시조, 탕임금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일신우일신(매일 아침 반성하고, 하루를 새롭게 다짐하는 일)의 마음을 늘 잘 새겨보는 것이 참으로 좋겠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계속 더욱 개선되어야 할 존재이기에, 아무리 그 인격이 훌륭하더라도, 아무리 잘난 사람이어도, 결국 머물러 있으면, 바로 썩게 마련이다.
즉, 만약 당신이 한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그래서 결국 나태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면, 점차 잊혀지게 되거나, 퇴보하게 되거나, 타락하게 되고 마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마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듯이, 늘 일일신우일신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내어, 아주 영롱하게, 아주 명료하게 빛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무엇보다, 항상 자기 마음속의 불필요한 경계선을 완전히 지워낼 수 있도록 하여, 아주 크게 열린 마음이, 매우 환한 희망의 마음이 지속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래서, 당신의 생(生)이 과연 진정으로, 아주 귀하게 빛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끝”